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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석에게 바란다.

나도 우리 어머니 아버지처럼 살고 싶다.

by 키수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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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집단으로부터 호감을 얻어야 생존할 수 있는 정치인들은 말의 끝을 뭉갠다. 적합한 지칭을 피하며 모호한 표현으로 문제를 일갈한다.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 같은 말을 해 놓아야, 예상치 못한 상황이 생겼을 때 본인의 몸을 숨길 여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의 수사학은 그래서 늘 답답한 인상을 준다.


이준석의 말은 짚으려는 바가 명확하다. 난해한 표현 뒤에 숨어 몸을 사리지 않고, 원하는 바를 정확한 표현으로 전달하여 핵심을 파고든다. 그 모습이 가끔은 적나라할 때도 있으나, 고구마를 가득 먹이는 정치인들의 화법에 질린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시원하다. 문제가 있는 부분은 명확하게 걸고넘어지고, 본인의 진영이 잘못한 부분은 숨기지 않고 인정하는 모습은 공정하고 투명한 사회를 살고 싶은 이들의 바람과 닿아 있었다. 특히 기성 정치에 지친 2030 세대의 그것과 닿아 있었는데, 그 접점에서 이준석 현상이 피어났다.


36살의 젊은 정치인 이준석이 대한민국 제1야당의 대표가 된 지 삼 주일이 됐다. 국민의 힘 지지도는 국정농단 이후 최고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국민의 힘 당원 가입자는 작년과 비교해 10배가 늘었는데, 그중 90%가 2030 세대라고 한다. 더 놀라운 것은 호남 출신 2030 세대의 당 가입도 큰 비율로 늘고 있다는 점이다. 헌정사 최연소 당 대표로 선출된 이준석에게 거는 기대는 진영을 막론하여 그에게 모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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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진보 정당은 언더독들의 입장을 대변한다. 기득권 세력에 맞서는 정신이 진보정당의 깃발 아래 모여들어 적폐와 맞선다. 한국 사회도 군부 독재 세력과 맞선 운동권 세력들이 진보정당 아래 모였고, 감사하게도 민주화를 이뤄냈다. 우리는 그들을 486세대라 불렀고, 그들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탄생의 주역이 되며 한국정치의 핵심 세력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로부터 약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서울역에서 시청에서 그리고 신촌에서 독재 타도를 목놓아 외치던 언더독들은 이 사회의 대표적인 기성세력이 되었다. 우리는 그들을 민주당이 부른다.


보수정당의 연이은 자승자박은 민주당에 계속해서 기회를 허용했고, 집권여당이 국회 단독 과반수를 차지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하지만 거리에서 민주화를 부르짖던 이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이전의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했던 바가 커서인지 더 실망스러웠다. 앞에서는 공정과 정의를 얘기하면서, 뒤로는 자식에게 편법으로 기득권을 물려주고, 투기를 일삼으며 자산을 증식하고 최후의 보루였던 윤리와 도덕성마저 잃는 모습은 말 그대로 참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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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이래 최초로 부모 세대보다 못사는 세대가 등장했다.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라는 웰빙이 국민들의 관심사였던 게 2000년대 중반인데, 2020년이 돼서는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생존을 고민하게 됐다. 임금 상승률은 자본 상승률을 한참 하회하고, 양질의 일자리는 계속해서 줄어만 간다. 있는 집 자제들만 비빌 수 있는 그들만의 리그는 점점 두터워진다.


공부 좀 한다는 소리를 들으며 대학 생활을 한 인재들까지도 지방직 9급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는 우리 세대가, 그토록 만류하는 가상화폐에 한탕을 거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내 집 한 채 장만해서 가족과 오손도손 살고 싶은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이 요행이 생겨야만 가능한 시대가 됐으니 어쩔 수가 없다.

진보의 상징과 같은 2030 세대가 보수정당으로 향하고 있다. 광화문에서 박근혜 하야를 외쳤던 젊은 촛불들이 이준석이라는 젊은 보수정당 대표를 비추고 있다. 철저하게 파괴되어 가고 있는 계층 사다리의 가장 아래에서 동아줄을 잡는 심정으로 그를 잡아본다.


그가 무늬만 젊은 정치인이 아니길 바란다. 배경이 아닌 실력으로 인정받고 보상받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그의 말이 감언이설이 아니길 바란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상황에서 제1 야당 대표 하나 바뀐 것이 뭐 대수인가 할 수도 있지만, 그의 움직임이 나비의 날갯짓이 되어 태풍이 몰아치길 바란다. 태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서 OECD 최하위 출산율의 대한민국이 다시금 자식을 키우고 싶고, 꿈을 꾸면 이룰 수 있는 국가로 태어나길 바란다.


나도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성실하게 일하면 내 집도 사고 차도 사고 가정도 단란하게 꾸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서울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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