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 아재로드_아홉

나는 지금 여기 수채화 클래스

by ki




# 인생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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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마이 어느 뒷골목을 걷다가 벽을 찍습니다. 벽의 포스터를 찍습니다. 아니 포스터가 붙은 벽을 찍습니다

그 찰나의 순간, 지나갑니다. 한 사람이 지나갑니다. 아니 한 사람의 인생이 지나갑니다.

여행자의 눈으로 보는 치앙마이는 참 여유롭고 평화로워 보이지만, 참 아닙니다.

조금 오래 이곳에 머물러 살.다.보.니 저마다 치열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문득 치열함을 잃어가는, 잊어가는 내 인생에 수만 가지 질문이 터져 나옵니다. 딱히 답도 없는.



# 수채화처럼 살 순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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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것보단 싫어하는 것이 더 많은 참 피곤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잘할까 보단, 어떻게 하면 그만할까 고민만 하는 참 찌질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나는


watercolor, 낙서하듯 종종 그림을 그리지만 수채화는 단연코 싫습니다. 수채화는 명확하지 않고 물과 색을 컨트롤해야 하는 피곤함이 싫습니다. 왠지 어쩌다 섞여 나오는 것 같은 그 결과물이 싫고, 덧칠하는 그 형태가 싫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채화 클래스 예약을 합니다. 수채화를 해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싫어하는 것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싫어하는 것이 많은 내 인생이 싫어서, 물에 물 탄 듯 물에 물감 탄 듯 그렇게 하루라도 살아 보고 싶었습니다.



# 허물어진 경계, 또 다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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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붓, 색.

영어가 어색한 선생님은 한 번씩 웃으며 눈짓, 손짓으로 시범을 보입니다.

그 미소가 붓 같습니다. 물과 색을 품은 수채화 붓 같습니다.


먼저 색을 칠할 곳에 투명한 물을 바릅니다.

투명한 물 위에 색을 올립니다.

그러면 물을 따라 색이 퍼져 나갑니다.

그 위에 다른 색을 올립니다.

그러면 색과 색이 만나 또 다른 색이 퍼져 나갑니다.


아... 왠지 모르게 심장 박동수가 빨라집니다. 사춘기 시절, 방황도 할 수 있었고 반항도 할 수 있었던 오래전 그시절, 적어도 내겐 순도 100% 순백색의 날들이 떠오르습니다. 설렙니다.

물과 색의 번짐이, 섞임이, 만남이 예쁩니다. 착합니다. 순수하고 맑습니다.


지금은? 오래전 물감이 굳어있는 붓 같은 내 인생.

물도 색도 없고, 섞임도 만남도 없는 말라 비틀어진, 삐뚤어진 순도 100% 시커먼 아... 조울증 환자도 아닌데 급 가슴이 아파 옵니다.




# 못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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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감성도 잠시, 짜증이 몰아닥칩니다. 내 뜻대로 되질 않습니다. 그러다 문득 '내 뜻은 뭘까?'

잘 그리고 싶었나? 똑같이 그리고 싶었나? 선생님처럼 그리고 싶었나? 칭찬받고 싶었나?

내 인생은 어쩜 못한다는 것에, 실패한다는 것에 파블로프의 개처럼 무조건 반응을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못하면 못난이고 실패하면 실패자라고... 그래서 뭐든 일단 두려워하고, 하기조차 싫어하고, 그래도 어쩌다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면 잘하려고 하고, 발버둥 치고... 그러니 할수록 힘든 그런 인생을 살았나 봅니다.


얇은 펜 하나 들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디테일 하나하나에 혼자 목숨 걸고 살던 내 피곤한 인생에,

물과 색을 품은 붓 한 자루 쥐어 주고 싶습니다.

그 붓으로 물을 바르고, 색을 올리고, 내 인생에 새로운 색을 칠하고 싶어 졌습니다.

진짜 조울증 환자는 아니지만 갑자기 기분 좋아졌쓰!


오늘 밤 꿈엔 사춘기 시절 나를 만나고 싶습니다.

20대 그때의 나도 만나고 싶습니다.

월급쟁이 그때 나도 만나면 좋겠습니다.

만나면, 모두 다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려 주고 꼬옥 안아 주고 싶습니다.


"괜찮아. 용쓰지마. 그게 잘 사는거야"



2018년 1월 어느 날 @chiangmai

* https://www.instagram.com/ki_da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