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 아재로드_일곱

나는 지금 여기 세라믹 클래스

by ki


# wake up! wake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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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치앙마이 생활에 익숙해진 것일까? 늦잠이 시작되었습니다. 제주도의 게으른 아침들처럼.

오늘은 며칠 전 원데이클래스로 도자기 수업을 예약해둔 아침이기에, 늦잠은 여유가 아니라 늦잠 그대로의 늦잠입니다.

아무리 늦잠을 잤어도 아침의 커피 한잔은 해야 합니다. 늦게 일어나도 아침은 아침이니까.

나의 아침도, 나의 인생도, 나의 생각도 깨어납니다. 그렇게 오늘도 시작됩니다.



# 작업실, 공간이자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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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 slow hands studio ]

여행자들이 꼭 한 번은 들리는 페이퍼 스푼에서 걸어서 땀이 날랑 말랑한 거리,

여행자들이 꼭 한 번은 들리는 반캉왓에서는 걸어서 땀나는 거리에 있습니다.


늦잠과 커피로 조금 늦게 도착했지만,

뒤통수는 가수 오혁 같고, 앞통수는 작가 메가쇼킹 같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해 줍니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 그의 작업실 곳곳을 대 놓고 훔쳐보기 시작합니다. 선반들, 도구들, 먼지들, 흔적들....

뭔가 느낌적인 느낌이지만 왠지 내공이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뭔가 닳고 닳은 느낌이 있는 듯 없는 듯, 뭔가 촉에 걸리지가 않습니다.

'아이씨~ 그냥 원데이 클래스로 비즈니스나 하는 곳인가보네...'

까칠한 내 성격에 나의 소중한 하루를 그냥 누군가의 비즈니스 도구로 이용 당하는 건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수업료를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냥 가버릴까 합니다.


갈때 가더라도 슬쩍 확인 사살 들어가 보니, 예전에 다른 곳에 작업실이 있었는데 못된 주인한테 쫓겨나서 얼마 전 이곳을 이사를 왔다고 합니다.

'아... 나는 왜 이렇게 늘 속단하나? 나는 왜 늘 겉모습으로 판단하는가? 아무 내공도 없는 내가 무슨 눈으로 그 누군가의 내공을 읽을 수 있을랴!' 빨갛게 달아오른 부끄러운 마음을 감추고 수업을 시작합니다.


날카로운 이빨, 의외의 순한 눈의 불독녀석이 나를 쳐다봅니다.

"괜찮아.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 그렇다고 수업료를 버리고 그냥 가겠다는 극단적인 성격은 좀 고쳐."

라고 눈빛을 보내옵니다. 쪽팔립니다.



# DO NOT THINK TOO MU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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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데이 클래스를 예약하던 날 무엇을 만들지 생각해 오라는 일종의 숙제를 받았었습니다.

수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숙제부터라니 숙제 알레르기가 돋는 듯했습니다. 물론 안 했습니다.

학창 시절처럼 지각에 숙제도 안 해온 나,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그놈은 변치않는그놈입니다.


태어나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도자기, 내가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 얼마큼 할 수 있는지도 모르는데,

무엇을 만들까부터 생각한다는 것은 내 성격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나는 무엇이든 기승전결이 머릿속에 먼저 정리되어야 시작하는 고약한 성격의 소유자이니까 말입니다.


선생님> 뭐 만들지 생각해 왔어?

나> 아니..

선생님> 당황...


그때 옆에 있던 텍사스 출신의 남자님이 말합니다.

텍사스남> 괜찮아. 반죽하면서 생각해. 반죽하다 보면 흙이 말해 줄 거야.

너무 생각이 많으면 시작도 못하니까 그냥 흙이 뭐라고 하는지 들어봐.


내 찌질한 인생을 통째로 들킨 느낌입니다.

생각이 많은 인생,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생각만! 많은 인생,

그래서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한 인생...

'부끄럽다'보다 '불쌍하다'에 더 가까운 감정이 올라옵니다.


'얼마나 잘하려고 죽도록 생각만 했던건지,

못하는게 챙피해서 그랬는지, 못하는게 두려워서 그랬는지,

칭찬을 받고 싶어서 그랬는지, 인정 받고 싶어서 그랬는지...'


불독 녀석 이번엔 눈길도 주지 안습니다. 개무시.

태어나 처음으로 생각을 멈추고 합니다. 반죽을 합니다.

그리고 흙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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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 오혁 앞 메가쇼킹 선생님이 먼저 시범을 보여줍니다.

선생님> 요렇게 올려서, 요렇게 돌려서, 요렇게 하면, 요렇게 돼~

언제나 말은 쉽습니다. 말로는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나름 광고인으로 10을 넘게 살아왔기에, 내겐 행간을 읽는 아주 쪼금의 내공이 쌓였습니다.

그렇니까 요렇게~ 요렇게~ 저 요렇게 사이에는 '될 때까지'가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요렇게 올려서 될 때까지, 요렇게 돌려서 될 때까지, 요렇게 될 때까지 하면, 요렇게 돼"


그래, 그게 맞습니다. 뭐든 하다 보면 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될 때까지 하는 것입니다!

불독 개녀석이 이번에는 너도 한번 될 때까지 할 수 있으면 해 보라는 듯, 반 무시하는 눈으로 쳐다봅니다.




# 되든 안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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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말이 '될 때까지'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도 일단 합니다. 되든 안되든.

반죽을 하다 보니 손목이 아파옵니다.

요렇게 저렇게 만들다 보니 뜻대로 되지 않아 짜증도 올라옵니다.

아프고 짜증나고, 만사가 귀찮아집니다

나는 역시 '될 때까지'가 아니라 '하기 싫을 때까지' 그런 인간인가 봅니다.

에라 모르겠다~서둘러 마무리를 합니다.


마지막 사진의 왼쪽 컵이 섬세한 선생님이 만든 작품, 그 옆에 컵모양 흙 뭉치가 내 뭉치.

'뭐 그런 거지. 원데이니까. 원데이에 이 정도면 잘한 거지'라고 초긍정 마인드를 장착해 봅니다.

아프고, 짜증 나고, 만사 귀찮아졌는데 이상하게 다른 걸 만들어 보고 싶어 집니다. 변태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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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흙덩어리 한 조각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뱅글뱅글 돌려 봅니다.

'널 뭘로 만들어 줄까?' 흙과 대화를 시작해 봅니다.

'요즘 요가에 빠져 있는데 요가하는 나나 만들어 볼까?'

되든 안되든, 일단 또 하기 싫을 때까지 만들어 보기로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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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명: 뜻대로 접히지 않아 슬픈 몸뚱아리

부제: 접힐 때까지 ㅋ


개녀석께서 쓰윽 일어나 내 옆에 자리를 잡습니다.

여태 무시하던 개녀석이 다 끝나고 돌아가려 하니 옆에 와서 종아리를 핥습니다. 애교도 부립니다.

마치 또 오라는 듯, 아주 비즈니스 서비스 마인드가 느껴집니다. 생긴 것과 다르게 영악한 개녀석이였습니다.

그래도 귀여웠습니다. 사랑스러웠습니다. 또 와서 또 보고 싶어 졌습니다

역시 사람이나 개나 겉모습으로 평가하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 당연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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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끝나고 작업 책상과 도구들을 정리합니다. 쓸고 닦고 제자리에 두다가 생각에 잠깁니다.

'도구가 좋으면 무엇하리. 재료가 좋으면 무엇하리. 환경이 좋으면 무엇하리...

무엇하리. 내가 도구를 쓸 줄 모르니. 내가 재료를 다룰 줄 모르니. 내가 환경 탓만 하니. 무엇하리'


문득 뒤통수를 때리는 듯한 사실 하나가 떠오릅니다.

'무에타이 선생님도, 요리 선생님도, 도자기 선생님도 다 나보다 어리다. 그것도 한~~~~~~참 어리다'

'내가 더 많이 살았는데, 왜 너희 할 줄 알고 나는 할 줄 모를까?'

'난 아직도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는데 너희는 어떻게 벌써 그것을 찾아, 그것을 하고 있을까?'

'숱한 밤을 지새웠겠지? 내가 월급에 쩔어 지쳐 잠든 숱한 밤들을 너희는 너희가 좋아하는 것들로 꽉 채웠겠지'

'그래서 너희는 할 줄 아는 것이 있고, 그래서 너희는 그렇게 행복해 보이는 것이었겠지?'


참 다행입니다. 이 당연한 것들을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서.

참 부럽습니다. 당연한 삶을 사는 너희 선생님들이.



# 아재 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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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오혁 뒤 메가쇼킹 선생님에 매달려 숙소로 향합니다.

오토바이를 처음 타 봅니다. 수줍게도 선생님의 허리를 꽉 안았습니다. 무서우니까 말입니다.

참 곱게 자란 아재인가 봅니다. 온실 속에서 무럭무럭 자란 아재인가 봅니다.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해 본 것도 없는,

정해진 것들이 정말 정해진 것인 줄만 알고,

공부하고, 졸업하고, 취직하고, 월급 받고, 그게 정답인 줄만 알고 살아온 아재인가 봅니다.


나를 숙소 앞에 내려주고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며 빠라바라바라밤 떠나가는 앞 오혁 뒤 메가쇼킹 선생님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봅니다. 아주 멀고 먼 훗날, 그가 나와 똑같은 나이의 아재가 되었을 때 그는 멋진 아재로 살고 있을 듯합니다. 오늘도 저렇게 멋지게 살고 있는데 그런 오늘들이 모이면 먼 훗날은 얼마나 더 멋져질까? 부럽고 부끄럽고...


오늘은 우리 대한민국 젊은것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너희는 정말 하고 싶은 게 있니? 난 모르겠다.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이 나이 되도록 아직도 모르겠다"




2018년 1월 어느 날 @chiangmai * https://www.instagram.com/ki_da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