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isun Yoon Jun 17. 2019

장표란 무엇인가

장표란 파워포인트 슬라이드 

한국에서 3여년간 근무했던 장표의 왕국, LG화학에서는 파워포인트 슬라이드(그들의 언어로 "장표"라고 한다)로 거의 모든 보고를 받는다. 사람은 환경에 적응을 하는 동물이라더니 입사하고 나서 좀 지나면 신기하게도 장표를 잘 만드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은 욕심이 생기게 된다. 슬슬 핫키를 외우려고 노력하기 시작하고 MS 오피스 신상이 나오면 파워포인트의 새 기능들을 동료들과 같이 점검하면서 진지하게 토론까지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파워포인트 실력을 키워가던 중 LG에서 기획팀에 있는 친구(이 친구들은 한국최고의 프로 파워포인터)들의 파워포인트 작업을 실제로 보게되면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된다.

아... 내가 우물안 개구리였구나... 파워포인트는 스타크래프트 하듯이 하는거였구나... 왼손은 키보드에서 핫키를 담당하고 오른손은 마우스를 담당하면서 계속 화면에서 정신없이 뭔가가 번쩍번쩍해야하며 그후에는 파워포인트의 모든 오브젝트들의 위치가 빈틈없이 제자리를 찾아가 있어야 한다. 또한 여러사람들로부터 취합된 다양한 장표가 폰트, 사이즈, 색상면에서 하모니를 이루고 있어야 한다. 나도 저렇게 간지나게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만지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든다.  


세월이 더 흘러가면 결국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빨리 잘 만든다는 것은 내 하드디스크에 보유한 슬라이드의 양의 싸움이라는 귀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내가 처음부터 하나하나 다 만들라고 하면 안되는 거였구나...아무리 열심히 해도 여러사람들이 해놓은것들을 잘 취합하는 사람 못이기는구나...


그렇게 파워포인트에 에너지 쏟으며 나의 20대후반을 보내다 병특 마치고 퇴사를 했고 미국에 왔다. 미국에 와서는 아무리 중요한 발표도 백지상태부터 모든 슬라이드를 만드는데 두세시간을 안넘기는 주변사람들을 보다보니 그게 더 합리적라고 느끼게 됐다. 아니 합리적이라고 느낀지는 오래됐는데 나도 정말로 파워포인트 슬라이드 만드는 시간을 급격히 줄이기 시작했다. 미국사람들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정말 대충 만든다. 자기가 써놓은 아티클을 그냥 copy&paste하고 번호나 다는 정도인 경우가 흔하다.


그렇게 십여년을 지내오고 있다가 오늘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하나 하는 일을 겪었다. 팀 동료가 본인의 아이디어를 diagram으로 그린것을 어떻게 컴퓨터로 그릴지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을 우연히 보게됐다. 비록 내가 프로 파워포인터들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장표의 왕국출신으로서 금새 만들수 있을것 같아서 해주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나보고 다음주까지 만들수 있겠냐고 묻는다. 저 한페이지를 말이다. 뿜을뻔했다.


그래서 정말로 후다닥 만들어서 보내줬다. 그랬더니 말그대로 난리가 났다. 지난 6년간 받아본적이 없는 격한 칭찬을 오늘 받았다. 나중에 그 친구랑 추가수정을 하는데 다른 한명이 뒤에서 신기하다는 듯이 내가 파워포인트 다루는 걸 구경을 한다. 뭐랄까 오락실에서 오락잘하는 애 계속 지켜보는 그런 분위기였다. 나보고 심지어 MBA같다는 소리까지 했다. 태어나서 처음 들어본다. MBA같다는 말은...



생각해보니 JP모건에서도 한번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신경써서 만들었다가 내 보스가 좋아했던 적이 있다. 내 보스는 파워포인트를 마치 워드쓰듯이 썼었다. 그냥 워드문서보다 글자싸이즈가 클뿐이다. 다른 기능은 그에게 무의미했다.


LG본사 기획이나 한국광고기획사에서 발표자료 만드는 사람이 미국은행에 오면 초능력자 취급받을지도 모르겠다. 수식들 제대로 맞게 전개했는지 아무리 꼼꼼하게 따지고 파이썬/C++ 코드 깔끔하게 잘 짤라고 아무리 노력해봐야 그냥 지가 해야 할 일 했나보다하지 칭찬 못듣는다.

작가의 이전글 전세계 수학자들이 사랑하는 분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