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머무는 곳은 어디인가?

4부. 나는 혼자가 아니다

by 은파
나는 그냥 세계 속에 내던져진 존재다.


코로나 19 사태 초기에 한・중・일 등을 중심으로 한 동양권 국가보다 미국 등 서구권 국가에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규모 감염자가 나오자 처음에는 갸우뚱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미국만 하더라도 전 세계에서 단연 으뜸으로 확진자와 사망자가 쏟아져 나왔고, 서구권 국가 대부분이 같은 추세를 보였다. 이들 국가는 경제적 측면과 아울러 의료시스템도 잘 갖춰진 선진국에 해당하였기 때문에 상식선에서 이해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서구권 국가에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한 측면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개인의 자유를 동양권 국가보다 구속하기 어렵다는 역사적 현실, 마스크 착용에 대한 극도의 문화적 거부감, 일부 지도자의 잘못된 확신이나 신념, 노동환경의 차이로 인해 공무원과 의료진 동원이 동양권 국가보다 어렵다는 점 등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한다. 물론 이 외에도 더 다양한 요인이 있을 수 있으나, 개인적으로는 마스크 착용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가장 큰 요인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동북아 국가에서 코로나 19가 먼저 확산하였다는 점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한국과 일본에서도 코로나 19가 한 때 맹위를 떨쳤으나 소위 팬데믹 상황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반면, 서구권 국가에서는 일단 발생하고 나자, 미국뿐만 아니라 전 유럽 국가에서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짧은 시간에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회적 거리 두기', '마스크 착용', '손 씻기' 등 코로나 3대 방역수칙을 이제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3대 방역수칙 중 서구권 국가에서 가장 논란이 된 것이 바로 '마스크 착용' 문제였다. 코로나 19 팬데믹 초기에 마스크 착용에 대한 서구권 사람들의 반발은 상상을 초월했다.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자 정부에서 마스크 착용을 적극적으로 권장하였지만, 반대 시위뿐만 아니라 개인들 간에도 마스크 착용을 권유하다가 총격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팬데믹 초기부터 팬데믹이 고조된 상황에 이르기까지 미국 등 서구권 국가에서는 마스크 착용에 대한 반대가 많았고, 이로 인해 코로나 19가 더욱더 확산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동양권 국가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마스크 논란이 왜 서구권 국가에서 발생했을까? 이는 문화적 차이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동양권 국가 사람들은 유교 문화권 영향으로 사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을 불손하다고 보았으나, 서구권 국가 사람들은 의사를 전달할 때 표정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특히,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얘기하면 상대방이 무엇인가를 속이고 있다는 생각이 깊게 각인되어 있다. 또한, 이들은 범죄자나 병에 걸린 사람들만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는 편견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마스크 착용에 대한 거부감이 컸을 것이다. 이외에도 자유권과 평등권을 얻어내기 위한 투쟁의 역사가 있었던 서구권 국가의 상황을 이해해야만 한다. 중세시대가 붕괴한 이후부터 프랑스 대혁명 시기까지는 자유권과 평등권을 쟁취하기 위한 민중들의 움직임이 용틀임 치고 있었으며, 프랑스 대혁명에 이르러 그야말로 그동안 누적되었던 힘들이 본격적으로 분출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마스크 착용 강제도 개인의 자유권을 구속하는 것으로 보았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동양권 국가에서의 자유권은 어떻게 확보되었을까? 유교 문화가 지배했던 이들 국가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 왕조시대가 1900년대 이전까지 유지되었기 때문에, 개개인의 자유권은 그다지 강조되지 않았다. 하지만 산업혁명 시대의 서구권 국가들이 축적된 힘을 바탕으로 많은 동양권 국가들을 식민지로 지배하게 되면서 서구적인 자유권이 서서히 동양권 국가들에 이식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보면 서구권 국가의 자유권은 인민의 자발적 힘을 통해 쟁취된 것이지만, 동양권 국가에서의 자유권은 서구적 제도를 이식하는 과정에서 안착이 되었기 때문에 두 사회의 뿌리에 자리 잡은 자유권에 관한 생각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로 인해 서구권 국가에서는 마스크 착용을 정부가 밀어붙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적 차이점을 염두에 두지 않고 무작정 서구권 국가를 비판한다면 역으로 동양권 국가에 대한 서구적 편견에 대항할 논리가 빈약해질 수밖에 없다.




태초에 둘이 있었다


아담의 세계

하와의 세계


둘의 세계 서로 연결되어

또 다른 세계가 열리고

무수한 시간 속에서

헤아릴 수 없는 세계들이

대지 위에 자리 잡았다


신비로운 세계들은

존재의 빛을 만방에 퍼트려

조화로움 속에서

하늘을 숭배하며 살았도다


왜 하나의 세계를 만들려

그리 애쓰는가

얼마나 지루하고 삭막한

세상인지 정녕 모르는가


다른 것은 다르게 놔두자


하나의 세계가 아닌

팔십억 개의 세계가 있다면

신성이 임재한 세상은

스스로 열릴 것이니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 지구적 현대 사회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과학기술 중심 사회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과학철학의 역사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이원론적 세계관에 그 뿌리를 두고 있지만, 과학철학이 본격화된 것은 프랑스의 경험론적 과학철학자 베이컨과 독일 합리론의 선구자 데카르트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러한 과학철학에 의하면 세계는 그야말로 과학적 세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물질은 원자와 전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러한 구성요소가 결합하여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 지구, 태양계, 우주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세계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은 원자와 전자의 총합 외 다른 것이 아니게 된다. 과학적 사고방식에 따르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것이 된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세계 관념으로 사회의 모든 현상을 과연 설명할 수 있는 걸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물론 물리적인 실험이 가능한 현상은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겪고 있는 각종 사회문제는 과연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요즘에도 사회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사회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한다고는 하지만, 이는 어찌 보면 통계적으로 어느 정도의 설명이 가능한 것이지 근원적인 해답을 제시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면 하이데거가 말하는 '세계'를 살펴보자. 하이데거에 따르면 세계는 물리 과학이 설명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는 세계를 물리적인 것들의 총합이나 거창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처해있는 '그곳'이라고 말한다. 쉽게 말해 그냥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관계하고 있는 모든 환경이 세계라는 것이다. 우선 나를 생각해보자. 나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특정한 지역에서, 특정한 국가에서, 특정한 문화권에서 살고 있다. 이렇게 둘러싸여 있는 나만의 세계는 다른 사람들과는 모든 면에서 다를 수밖에 없다. 물론 공통적인 세계라는 울타리가 있으므로 일정 부분은 관념이라든지 생활방식에 있어서 유사한 행태를 보이기도 하지만, 나와 똑같은 개인 역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전 세계에 아무도 없다는 점을 알아야만 한다. 이렇게 본다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사람의 숫자만큼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세계라는 것은 물리적 총합도 아니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인간 개개인이 모두 다 다르게 가지고 있는 그 무엇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중세시대의 시골 마을을 생각해보자. 이 시기, 이 장소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교회의 종탑이라고 할 수 있다. 새벽에 종이 울리면 일어나 일과를 시작하고, 점심때 종이 울리면 점심 식사, 저녁에 종이 울리면 일과를 마무리하게 된다. 물론 그 중간에 예배 종이 울리면 기도도 올릴 것이다. 이렇게 이 시기의 사람들은 교회 종탑에 의지하여 살아가게 되지만, 요즘 사람들은 핸드폰 알람으로 아침을 시작하고 각각이 속한 사회의 시간표대로 움직이다가 저녁이 되면 다시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방송 등을 시청하면서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하게 되는데 이 둘의 세계가 과연 똑같다고 할 수 있을까? 어찌 보면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세계가 물리적인 것들의 총합이라면 이렇게 다른 세계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러한 시각에서 본다면 앞에서 말한 서구권 사회의 마스크 착용 거부 심리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지만, 그들이 살아온 역사나 문화적 차이를 고려한다면 우리와 다른 서구권 사람들의 세계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땅에서 현재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중세시대의 십자군 기사나 고대 시대의 연금술사는 될 수가 없다. 우리는 단지 현재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주어진 상황 속에서 가능한 것들에 맞춰 우리의 삶의 방향을 정할 뿐이다. 이제 우리는 세계라는 것은 과학자들이 얘기하는 물리적인 것들의 총합이 아니라, 지구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숫자만큼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지구상에 80억 명의 인구가 있다면 80억 개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세계를 이렇게 본다면 모든 사람이, 모든 국가가, 모든 문명이 왜 다를 수밖에 없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제는 세계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자.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조금 더 평화로운 세상으로 바뀌는 그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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