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은 내 것인가?

4부. 나는 혼자가 아니다

by 은파
나는 내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요즘 학생들은 학교 급식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등굣길을 오가는 학생들 손에 책가방과 도시락통이 함께 들려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픈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늘 도시락 반찬 때문에 고민이 많았었다. 모두 힘들게 살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도시락 반찬이라고 해보았자 뻔했다. 대부분 김치에 콩자반이나 단무지가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때는 소위 '있는 집' 아이들이 도시락 반찬을 선도해 나갔다. 그들이 소시지를 싸 오면 소시지를 뒤늦게 싸가고, 햄을 싸 오면 또 햄을 따라 하고 이렇게 늘 뒤따라가기 바빴다. 도시락뿐만이 아니었다. 당시에도 '나이키'나 '프로스펙스' 등의 신발이 유행을 하고 있었고, 옷 같은 경우도 '있는 집' 아이들은 '인디언' 등과 같은 상표의 옷을 입었다. 도시락은 쉽게 따라 할 수 있었지만, 신발이나 옷 같은 경우는 경제력의 차이로 인해 쉽게 따라잡지 못하고 부러워했던 기억만 가득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 자신의 '비교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된 것 같다. 이러한 역사는 요즘이라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비교의 대상이 신발이나 옷 등이라는 점은 여전하지만, 그 외에도 '희귀 템'을 소유하여 보여주려는 욕구가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2019년에 업무차 제주도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하루가 지나고 비행기 시간에 맞춰 공항에 가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갑자기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유는 스타벅스 때문이었다. 스타벅스 매장에 가면 유채꽃 등을 디자인한 제주도 스타벅스만의 MD(기획상품) 상품이 있다는 것이다. 이유를 묻자 주변에 있는 친구들이 제주도 스타벅스 MD 상품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갖고 있어야만 대화가 되고, 소위 꿀리지 않는단다. 어찌 보면 유치하기도 했지만 간절하게 부탁하는 딸아이의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어 빠듯한 시간을 쪼개 딸아이가 원하는 상품을 구매했다. 지금도 그 물건을 받고 행복해하는 딸아이의 얼굴이 생생하다.


2018년 평창올림픽은 수많은 이슈를 몰고 다녔다. 북한 선수단이 참여하여 남북 간 화합의 장이 펼쳐졌고, 여자 아이스하키팀의 경우는 남북 단일팀으로 출전하여 많은 화제를 뿌리기도 하였다. 1,218대의 드론이 펼친 드론 쇼 또한 많은 이의 주목을 받았다. 이외에도 더 많은 이슈가 있었지만 온 국민의 애간장을 태운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오리털 롱 패딩' 열풍이었다. 저렴한 가격과 살아있는 동물의 털이 아니라 죽은 거위의 털로 제작한 것이 동물보호란 이슈와 맞물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심지어 온라인 스토어가 마비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처럼 유행이라는 바람은 시대를 불문하고 항상 불고 있으며, 이를 따라잡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 유행에 맞춰 한껏 멋을 부린다고 해서 나 자신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유행이라는 것은 금세 지나가고 새로운 유행은 또다시 찾아온다.




지나가다 보았네

나 아닌 나를

나 같은 너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방송을 보면서

다른 이 흉내 내기에 바쁜

모조품만 있는 세상


모두 같은 줄도 모르고

도도한 척 서 있지만

다른 이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진정 알고나 있는지


모든 것을 태워서라도

아무도 아닌 그가 아닌

세상 속 하나뿐인 나를

진리 속에서 찾아보자




우리는 흔히들 자신의 결정에 따라 주도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고 착각한다. 물론 이에 대해서 반박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삶의 과정 중 하루를 생각해보자(사례로 든 하루는 평균적인 사람들의 일상을 예로든 것이다). 저녁에 퇴근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스포츠나 드라마 등을 보면서 하루를 마감하고, 아침에 일어나 뉴스나 신문 등을 보면서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파악한다. 출근 후에는 일에 몰두하지만, 휴식 시간에는 방송에서 본 내용을 서로 이야기하며 공감대를 나눈다. 쇼핑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홈쇼핑 채널을 통해서 옷이나 신발 등을 구입하고 지인들과 정보를 공유하며 서로의 취향을 맞추어 나가기도 한다.


여기에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내가 말하는 것이 과연, 내가 말하는 것일까 하는 문제이다. 어찌 보면 방송이나 뉴스가 내 머릿속에 심어준 내용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남들이 말해주는 내용을 기억했다가 재방송하는 때도 있을 것이다. 또한, 내가 꾸미고 있는 차림새도 마찬가지다. 나는 내가 주도적으로 선택했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은 기업들의 제품 광고가 자신도 모르게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습관적으로 구매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어쩌면 제품이 좋고 나쁨은 상관없고 기업 광고가 만들어 내는 이미지를 사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러한 삶은 우리에게 편리성을 제공해 준다. 고민 없이 대화의 소재를 얻게 되고, 돌아다니며 정보를 파악하는 수고 없이 물건들을 손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삶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사회가 이렇게 나를 길들였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그냥 그 삶 속으로 빠져 버린 것이다. 이렇게 살아간다면 죽을 때가 되었을 때, 과연 후회 없이 주도적으로 내 삶을 살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하이데거에 따르면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삶을 따라가는 사람들을 '세인'이라 부른다. 우리는 세인이 즐기듯이 같이 즐기고, 세인이 보고 판단하는 것처럼 문학과 예술에 관해서 읽고 판단한다고 한다. 또한, 우리는 세인이 물러서듯이 '군중'으로 물러서기도 하고 세인이 격분하는 것을 보고 우리도 격분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삶을 하이데거는 '세인의 일상성'이라고 말한다. 이를 종합해보면 우리의 삶은 그야말로 나 자신의 삶이 아니고 세인의 삶을 일상적으로 살아간다는 말이다. 결국, 나는 나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고 남의 삶 속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나 자신의 비교 역사에서 나왔을 것이다.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게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먹고, 같은 것으로 꾸미면서 말이다. 그러면 이러한 '세인의 일상성'을 벗어나서 나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세인의 삶을 살아가게끔 길들었기 때문에 이를 벗어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간다면 자신의 삶이 너무도 초라해질 수밖에 없다는 현실은 계속 숙제로 남게 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을 냉철하게 되돌아보면서 사유의 힘을 키워야만 한다. 그렇다면 사유의 힘은 어떻게 길러질 수 있는 것일까? 요즘 사회가 기술 중심의 시대이기 때문에 인문학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있으며, 사유의 힘을 키우는 일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최근에도 인문학이 떠오르다 가라앉고를 반복하고 있지만, 개개인의 삶의 정체성 회복을 위해서는 인문학만큼 훌륭한 도구는 없다. 특히, 인문학 중에서도 철학자 한 명은 반드시 만나보라고 권장하고 싶다. 물론 다양한 철학자를 만나려고 노력할 수도 있겠지만, 한 명을 추천하는 이유는 하나의 사상에 깊숙이 들어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다른 사상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를 예로 들어보면 그는 서양철학 2000년 사와 꾸준한 투쟁을 전개해왔던 학자였기 때문에, 그를 연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다른 학자들의 논리도 습득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어렵다고 생각하지 말았으면 한다. 하루 이틀, 1~2년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꾸준히 해나간다는 마음만 있다면 누구라도 가능하다. 하루에 한 페이지, 아니면 일주일에 한 페이지를 넘기어도 일단 시작하자. 당신의 위대한 첫발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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