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라는 시를 보면서 최근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추를 통해 세상 이치를 재치 있고 엄중하게 표현한 시인의 의도는 무엇일까? 우리 선조들은 여러 과일 중에서도 대추를 가장 중요하게 여겨 제사상 맨 왼쪽에 올려놓곤 했다. 또한 예전에 먹을 것이 없었던 시절에는 대추가 한약재에 들어가 서민들의 건강을 챙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정도로 우리에게 친숙한 과일이기도 했다. 아마 이런 의미에서 장석주 시인은 대추를 소재로 세상을 설명하려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시인의 말처럼 대추 한 알에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응축되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본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의 이러한 위대한 언명은 기술만능주의 시대에서 그 존재의 힘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현대는 기술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기술 시대는 근대 서구 형이상학을 통해 확립된 인식이 세계적으로 보편화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물론 동양 사회도 이러한 흐름에 합류하게 되었고, 기술 시대가 극단화되면서 기술이 오히려 인간을 위협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면 기술 시대의 위험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선 자연 자원의 무분별한 약탈과 굴착, 환경오염으로 인한 삶의 터전 상실, 인공지능에 의한 일자리 위협 등을 기술 시대의 위험요인으로 꼽을 수 있겠다. 최근에는 이러한 기술이 인간의 생존과 안전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위험으로 떠오르고 있다. 인간이 생물학이나 자연학의 대상이 아니라, 고유성과 독자성을 갖지 못한 채 거대한 기술체계 속에서 한낱 기능인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이야말로 가장 두려운 현실이다.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 간 세기의 바둑 대결을 기억할 것이다. 총 5회의 대국에서 이세돌이 1번 이긴 것 자체가 화제가 될 정도로 인공지능 기술은 그 끝을 모르고 진화하고 있다. 최근에 만들어진 알파고 후속 버전들을 보면, 신이 아닌 이상 바둑으로 인공지능을 이길 만한 인간은 이제 지구상에 없을 것이다. 장기나 체스까지는 인공지능이 이길 수도 있다고 많은 사람이 생각했지만, 수많은 경우의 수가 있는 바둑에서도 기계가 인간을 이길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을 하지 못했다. 인공지능이 바둑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공지능을 통해 소비자 구매 패턴을 지속해서 축적해온 아마존은 소비자의 구매계획을 당사자보다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고, 유튜브로 동영상 10편 이상을 본 사람에 대해서는 유튜브가 가족보다 그 사람의 성격이나 취향에 대해 더 자세히 파악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의 삶 모든 곳에 인공지능이 자리 잡아가고 있는 현실을 보면 한편으로 걱정이 앞선다.
가끔 이런 상상을 하곤 한다. 인공지능 기술이 인간처럼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단계까지 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생각이다. 만약 인간들이 대규모 전쟁을 벌인다면, 인간들이 지금과 같은 생활방식을 버리지 못하고 환경을 지속해서 파괴해 나간다면, 인간들 때문에 기후 위기가 심화하여 지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된다면 아마 인공지능은 생각하게 될 것이다. 지구상의 가장 큰 위협은 인간이며, 인간이 지구상의 가장 큰 해충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영화에서처럼 인간 말살 작업을 벌일지도 모른다. 너무 극단화된 생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발생한다면 인류 최대의 위기가 닥칠 수도 있다. 물론 EU에서 정한 로봇 3원칙(1. 로봇은 인간을 해칠 수 없다. 2. ①에 어긋나지 않는 한 인간의 명령에 복종한다. 3. ①과 ②에 어긋나지 않는 한 자기 자신도 지켜야 한다.)이나 구글의 인공지능 개발 7대 원칙(1. 사회적으로 유익하고 2. 편견을 강화하거나 만들어내는 것을 피하고 3. 안전을 기반으로 테스트 및 제작하며 4. 사람들에게 책임을 질 수 있고 5. 프라이버시 디자인 원칙을 포함하며 6. 과학적 우수성을 높은 기준으로 유지하고 7. 이 같은 원칙에 부합하는 용도로만 사용한다) 대로 인공지능을 개발해 나간다면 인류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완벽해 보이는 3원칙도 최근 구글의 자율주행 차량 사고에서 보듯이 판단의 오류를 내릴 수 있는 변수는 예상외로 많다. 또한, 구글의 6대 원칙도 윤리에 초점을 두고 있는데 윤리라는 것도 결국은 사회에서 발생하는 각종 사건과 결합하면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이 또한 완벽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은 인간의 기술로 인공지능을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람처럼 생각하고 판단하는 인공지능 기술이 개발된다면 인간이 정한 원칙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인간만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도 진화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항상 생각해야만 한다. 따라서 인공지능이 인간에게 유익한 방향으로만 발전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기술이란 희망이 아니라 위협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에 따르면 기술 시대에는 가능한 모든 것을 최대한 이용하려는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사물뿐만 아니라 인간도 하나의 부품이나 현품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기술에 대해 여러 학자는 기술의 중립성을 강조한다. 즉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중요하고, 기술은 이에 맞춰 자신의 길을 찾아 나간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하이데거는 기술은 결정론적 숙명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기술이란 원래부터 인간에게 종속되지 않고, 인류를 종말의 길로 끌고 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코로나 19 사태나 기후변화 위기 등 기술 중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 하이데거의 예언이 점점 현실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현재의 추세대로 인공지능 기술이 개발되어 나간다면 21세기가 끝나기 전에 우리는 영화 속의 '터미네이터'를 직접 대면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끔찍한 미래를 피해 나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 보아야 한다. 노장사상 속의 물아일체( 物我一體) 사상과 그리스 시대의 '테크네' 시원에 감추어져 있던 '포이에시스' 정신의 회복이야말로 기술 시대의 위험을 극복하는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테크네'는 요즘으로 말하면 '예술'로 볼 수 있으며, 포이에시스는 시작(詩作)이나 시학(詩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창조적 원형이 유일하게 남아있는 예술성이 회복된다면 기술 운명의 수레바퀴 방향을 바꿀 수 있다고 보았다. 물론 예술 자체도 주문 생산방식으로 위기를 맞고 있지만, 작품의 창작과정 속에는 진리가 포함되어 있어 현대 기술의 위험을 극복할 수 있는 실마리가 예술에 있다고 본 것이다.
하이데거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미 기술 시대의 위험성을 충분히 목도하고 있다. 그렇지만 기술 시대를 극복하기 대안을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듯이 창작과정 속에서 진리를 찾아볼 수는 있겠지만,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그 과정이 지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개인적으로는 속도를 포기하는 과정에 정답이 숨어 있다고 본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선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은 지방에서 서울까지 걸어가면서 크게 불편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자동차나 기차 등의 개념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농업시대에는 모내기할 종자를 겨우내 보관하였다가 다음 연도에 그것으로 농사를 짓고, 가을이 되면 추수를 하는 생활이 대를 이어 반복되기 때문에 미래라는 개념은 1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미래라는 개념에는 1년 뒤뿐만 아니라 퇴직 후부터 죽을 때까지 그리고 자식들의 미래까지 들어있어 살아가는 자체가 늘 팍팍할 수밖에 없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삶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버릴 수 있기 때문에 어찌 보면 하루하루가 미래를 위한 전전긍긍의 시간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본다면 속도를 포기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어렴풋이 보이게 된다. 결국, 우리는 행복을 위해 살아가고 있지만 기술 시대가 정신적 행복은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컴퓨터가 등장하고 일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더 늘어나기만 하고, 핸드폰으로 인해 퇴근 후뿐만 아니라 주말에도 끊임없이 일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매스미디어가 발전하면서 전 세계 뉴스를 실시간으로 보고 있지만, 우리가 과연 그 모든 내용을 다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이러한 예에서 보듯이 기술의 발전은 우리에게 편리함은 주었지만, 행복은 주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기술이 제공하는 속도에 대해서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인간성 회복과 치유를 위한 진리의 과정은 어찌 보면 이미 늦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분명히 종말로 가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암울한 미래만 있으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예술을 통한 진리를 획득하는 과정이 아니어도 좋다. 기술 시대의 위협만 제대로 인식하고 개개인들이 조금씩 변화를 모색한다면 분명 거대한 물결이 뒤따를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우리 대부분은 알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실천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