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

2부. 비틀린 삶의 흔적들

by 은파
나는 맞고, 너도 옳다.


10여 년 전 뉴욕 주재 대한민국 총영사관에서 근무한 일이 있었다. 아이들 교육 문제 때문에 뉴저지주 Englewood Cliffs에 집을 마련했고, 아이들은 그곳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녔다. 당시 아이들 수업을 여러 번 참관할 기회가 있었는데, 특이했던 것은 아이들의 학습 참여 열기가 매우 높았다는 것이다. 선생님이 질문하면, 거의 모든 학생이 경쟁적으로 손을 든다. 선생님은 몇몇 아이들을 순서대로 지목하면서 답변을 듣는다. 아이마다 생각이 달라서 선생님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답변이 나오는 것을 매우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A라는 학생이 예상외의 답변을 해도 선생님은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하면서, 다른 학생의 답변을 유도했다. 물론 다른 학생의 답변에도 선생님의 대응은 비슷했다. 이러다가 선생님이 원하는 답변이 계속 나오지 않으면 '오늘 나온 답변은 나름대로 다 의미가 있다. 다만, 선생님 생각은 '이런 것'이니 함께 생각해보자.'라고 매듭을 지었다.


아이들 숙제를 도와주면서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미국 수학은 한국 교과 과정보다 훨씬 쉬워서 한편으론 걱정이 앞섰다. 몇 년 뒤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을 때, 한국 학생들이 배우는 수학을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미국에는 우리나라와 같은 과외 시스템이 없기 때문에, 다른 것은 몰라도 수학 숙제는 많이 도와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이들과 문제를 풀다 보면 한국식으로 가장 쉬운 방법을 찾아서 답을 내 거나, 아니면 아이들에게 공식을 알려주고 풀어보라고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 방법에 대해 조금은 난감해했다. 비록 쉬운 문제지만, 답을 한 가지로 풀어가는 숙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문제에 대한 풀이 과정을 다섯 개 정도로 해오라고 하는 숙제가 대부분이었다. 처음에는 한 가지 방법으로 해도 되는데, 왜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하는지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1년 정도 지나자 수학뿐만 아니라 다른 과목에서도 사물을 여러 가지 방향으로 바라보는 아이들의 변화를 뚜렷하게 목격했으니 말이다.


귀국 후 아이들의 변화는 놀라웠다. 학교 선생님들이 일성으로 말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우리 아이들이 매우 용감하다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질문하면 답을 정확히는 몰라도 무조건 손부터 든단다. 나는 아이들의 이러한 모습이 나름 흐뭇했다. 그러나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맞지 않는 정답에 대한 선생님이나 아이들의 반응에 점점 위축되어 가더니, 6개월도 안 되어 한국 학생들과 완전히 동화되었다. 또한, 답을 알고 있어도 혹시 틀릴지 모르니 손을 들지 않는 것이었다. 이때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 우리 사회에서는 정답이 한 개만 있다고 생각하는지, 왜 다르게 생각하면 틀린 것인지 등의 문제였다.




경건함이 떠난 사회

만연된 혼란은 도처에서

회오리처럼 휘감아 온다


정치적 무기력함

예술적 지반상실

학문적 무정체성

사회적 극단주의

종교적 근본주의


신적인 경외감과

숨겨진 비밀에 대한

무지로부터

곤경은 찾아온다


세찬 바람에 맞섬은

비밀의 열쇠이니

조심스레 우상을 깨트리자


세계 속에 사라져 버린

근거를 숨김없이 데려오면

관계는 다시 세워지리니

동굴 속 그림자를

지워버리자.




아마, 대한민국만큼 옳고 그르냐의 문제로 사회가 극단화된 나라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짧은 시간 동안 압축성장을 이뤄가기 위해서는 과정보다는 결과가 중요했을 것이다. 아이들의 교육도 마찬가지다. 선생님 역할은 가장 효율적인 공식을 동원하여 재빨리 정답을 내는 과정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이런 아이들이 사회로 나오니 과정은 보지 않고, 결과만으로 사물을 평가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물론 효율성을 바탕으로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2,220개 전 상장사 주식을 다 팔아도 애플 한 회사를 살 수 없다는 최근 보도를 보면 무엇인가 분명 변화는 필요하다고 본다. 수십 년 전을 생각하면 한국의 성장 속도는 그야말로 눈부시다. 다만 경제 구조의 취약성과 사회 문제의 복잡성 등을 고려하면, 지금 시스템으로 애플 같은 회사가 우리나라에서 나올 수 있을지 걱정이다. 지금이라도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고,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의 생각들을 포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의 발전은 분명히 정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나만 옳다'라는 오만과 편견을 벗어던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려면 진리에 대한 사상적 지평을 하루빨리 확립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다. 진리의 개념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고대 시대에는 진리를 플라톤의 '이데아'로 이해했다. 그는 감각적이고 변화무쌍한 것은 현실 세계이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참된 진리는 이데아의 세계라고 보았다. 중세 시대 사람들은 기독교를 절대 진리로 보았다. 이렇게 보면 고대 시대나 중세 시대 사람들의 진리란 현실 세계에 뿌리박은 상태에서 이데아의 세계나 기독교적 가르침을 꾸준히 추구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분법적 진리관은 근대 분석철학에서도 큰 틀에서는 유지되었다. 이 당시에는 진술이나 신념 같은 것들만 참과 거짓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이러한 진술이나 신념들이 어떤 사실이나 사태와 일치될 때에만 참이나 거짓으로 보았다. 결국 이에 따르면 존재자의 참과 거짓 여부가 곧 진리를 가르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좀 더 진전된 견해를 보인다. 그는 근대 분석철학의 견해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만, 진리를 분석철학의 시각으로만 한정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에게 진리란 숨겨져 있는 존재가 환하게 드러나는 것까지 확장된다. 다시 말해 그가 말하는 진리란 영원히 열려 있고, 생성하는 존재 자체가 개방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진리관은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하기가 어렵다. 어떻게 보면 암호를 나열한 것 같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이에 대한 해석도 다양한 방향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다. 하지만 그의 말에서 함의는 찾을 수 있다고 본다(이는 개인적인 견해임을 참고하기를 바란다). 그것은 열려 있다는 개방성, 생성한다는 의미에서의 변화성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분석철학에서처럼 진리를 진술이나 신념으로 축소해서 본다면, 참과 거짓은 결정론적인 관점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반면 하이데거처럼 진리를 개방성과 변화성까지 확장해서 본다면 진리란 고정된 그 무엇이 아니게 된다. 개방성이란 진리가 닫혀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열려있는 마음속에 진리는 생기(生起)한다는 말이다. 역사적으로만 보더라도 새로운 진리는 늘 탄생해왔다. 4차 산업 시대에 이르러 새로운 것들이 셀 수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는 항상 새롭게 등장할 수밖에 없다. 변화성 측면에서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진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늘 변화한다. 코페르니쿠스가 등장하기 전에는 천동설을 진리로 믿고 살았으나, 그 이후로 지동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것도 태양과 지구 두 개만 놓고 볼 때 그러한 것이지, 전 우주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다른 설명도 가능해질 것이다. 이처럼 과거에 진리였던 것도 시대가 변하면서 진리가 아닌 것이 되고, 그 역도 가능해진다.


따라서 나만 옳다는 오만과 편견은 나만의 생각일 가능성이 크다. 세상은 늘 변화한다. 개방성이라는 열린 마음과 변화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감히 진리라는 것을 주장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맞고, 너도 옳다.' 이러한 시대정신이야말로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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