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14일이었다. 이날 저녁 직원들과 함께한 회식에서는 단연 설리의 사망 소식이 화제였다. 윗글은 동료들과 대화 중에 설리 양의 죽음이 너무도 안타까워 '설리를 위한 변명'이라는 제목으로 즉석에서 써본 글이다. 그렇다. 남의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람 살리는 말을 하기도 바쁜 세상에서 얼마나 천벌을 받으려고 남의 말을 함부로 하는지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역 배우 출신 설리는 여성 걸그룹 '에프 엑스'로 활동하던 2014년 악성 댓글과 루머로 고통을 받다가 연예 활동을 잠정 중단했다.그리고 3개월 뒤에 활동을 재개하였으며, SNS를 통해 팬들과 활발한 소통을 펼쳐 나갔다. 특히, '악플의 밤'이라는 예능 프로그램 MC를 맡으면서 사회적 이슈에 대한 소신 발언으로 많은 팬의 사랑을 받았다. 설리는 악플로 가수 활동을 중단했지만,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더 단단해진 것 같았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SNS를 통해 팬들에게 자주 보여주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일부 악플러들은 설리를 향해 '관종'이란 이름으로 괴롭혔고, 일부 언론도 그런 설리의 모습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보도하기도 하였다. 겉으로 보기에 설리는 이러한 편견과 계속 싸워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악플의 밤'까지 진행했던 설리가 이슬처럼 사라져 가는 모습을 보니, 그간 그녀가 느꼈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이제는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일이 있은 지 한 달도 안 되어 설리의 절친이었던 구하라 또한 악플로 스러져갔다. 두 스타의 사망 이후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악플 문제는 여전히 진행 중이어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는 악플만의 문제가 아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온통 가짜 뉴스 때문에 난리다. 가짜 뉴스가 횡횡하는 이유는 이념적인 문제도 있지만 결국은 돈이 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특히, 페이스북이나 유튜브 등의 해외 채널들이 우리 생활에서 일상화되면서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태동한 채널들이라면 우리 사회 시스템 안에서 어느 정도 자정 기능을 발휘하도록 할 수 있다. 해외 채널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가짜 뉴스라고 해도 돈이 되기 때문에 컨트롤할 의사가 강하지 않고, 우리 사회에서 강제할 만한 수단도 마땅치 않은 것이 현실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가짜 뉴스들을 정규 매체들이 사실 검증 없이 받아 쓰니 문제가 더 커진다. 이들은 주장할 것이다. 사회의 다양한 의견을 전달하는 것이 언론의 사명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과연 그럴까? 물론 다양한 의견을 전달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사실이 아닌 것을 자주 보도하다 보면 국민은 사실로 믿을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보도를 통해 피해를 보는 사람은 분명히 존재한다. 이런 부분을 간과한다면 뉴스가 악플과 다른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말이 돌고 돌아
어디로 향하는가?
잘못 뱉은 말은 송곳이 되어
다른 이를 찌르지만
그대 향한 칼날로도 돌아오니
삼가고 또 삼가야 할 일
네 탓이라 저주하면
먹구름은 하늘을 뒤덮고
청천벽력 내리치니
그 폭풍 어디로 가겠는가?
무의미한 짐승의 탈을 벗고
작은 소망 함께 나눈다면
저주의 바다에도
새로운 하늘은 열리나니
때론 궤도를 잘 보자
말이 돌고 돌아
어디로 향하는지.
말의 향연이라는 시는 설리의 죽음이 있기 5년 전쯤에 써놓은 글이다. 그 당시에도 아니 그 이전에도 함부로 말하는 것 때문에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늘 있었다. 비단 요즘에만 있는 일은 아니다. 조선 시대 사극을 보면 궁중 내명부의 상황이 자주 그려진다. 이를 보면 왕비뿐만 아니라 왕의 여자들(그들의 직함을 나열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이해를 돕기 위함이다.)이 중심이 된 내명부에서는 왕의 총애를 얻기 위해 없는 사실도 만들어내고, 조그마한 일을 뻥튀기해서 상대방을 곤혹스럽게 하는 상황이 자주 나온다. 이를 그냥 내명부의 에피소드로 볼 수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내명부 여인들과 연결된 정치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서는 목숨까지 빼앗는 피바람으로 비화하기도 한다. 이렇듯 시대 여하를 막론하고 말로 인한 문제는 늘 있었지만, 요즘처럼 크게 이슈화된 적은 없는 것 같다. 이는 인터넷뿐만 아니라 다양한 매체가 발달하면서 말이 퍼져나가는 속도와 양이 어마어마하게 커졌기 때문이리라. 그러면 이러한 말의 문제는 시간이 가면 해결될 수 있을까? 아마 인간이 존재하는 한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의사소통 수단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언어에는 존재의 진리가 머물러 있어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한다. 달리 말하면, 언어는 진리를 날라다 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존재의 언어를 귀 기울여 들으면서, 거기에 숨어있는 진리에 순응할 때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언어는 진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흔한 말로 '말을 보면 그 사람을 안다'라고 할 것이다.
한편, 하이데거는 언어가 진리를 간직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의사소통 도구로서 근원적 사유가 결여된 상태를 '언어의 퇴락'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퇴락 상태라는 것은 언어가 진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인간의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에 불과한 상태를 말한다. 또한, 퇴락된 언어는 남을 짓밟는 도구나 한순간의 쾌락적 도구 외의 다른 것이 아니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 진리 속에서 거주할 진정한 언어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에 가서는 언어의 퇴락이 인간 본질에 대한 위협으로 작용한다고 하이데거는 강조한다.
설리의 문제를 언어의 문제로 살펴보자. 하이데거 관점에서 살펴보면 설리를 향한 악플들은 언어의 퇴락이 극단화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악플러들의 말은 순간의 유희일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잘 알려진 사람을 괴롭히면서 어쩌면 대리만족을 느끼는 도구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악플러들의 말은 참된 의미의 언어라고 볼 수 없다. 한편, 설리의 경우에는 이러한 악플러들의 말에 진정한 언어로 대응했다고 보인다. 설리가 쓴 말들을 보면 자신의 존재 의미에 대해 고민하며 쓴 글들이 대부분이다. 어떻게 보면 그녀의 말에는 그녀의 영혼이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도 사람인지라 인간으로서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인지, 결국에는 죽음을 선택하고야 말았다. 물론 그녀의 죽음이 슬픈 일이지만, 그녀는 '죽어서 이기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말을 보면 그 사람을 알게 되듯이 말이나 언어를 쓸 때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던진 말 한마디는 언젠가 반드시 내게 돌아온다는 것을 되새겼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