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중국 청두를 여행할 때 두보 초당에서 찍은 사진이다. 두보 초당은 중국을 대표하는 당나라 시대의 시인 두보(杜甫)가 한때 거주했던 암자 자리에 두보 기념관과 광대한 정원을 조성해 놓은 곳이다. 이곳에 뭔가 의미심장한 그림이 있어 사진을 찍으면서, 그림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위 그림에서 하늘을 향해 두 팔 벌려 기원하고 있는 이가 두보 자신이고, 두보를 둘러싸고 있는 원형의 불꽃들은 당시 끊임없는 전쟁으로 온 나라가 불타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라 했다. 불꽃 밖에는 전쟁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서민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하늘을 향해 백성들을 구원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는 두보의 모습을 이 그림 한 장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천 년 기다림 끝 마주한 님
너무도 편히 잠들어 있구나
가을바람에 초가이엉은
여전히 부서지고 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님의 꾸짖음은 허공을 맴돌고
피고름 발자국만 남아 있네
머리 둘 땅 한 평
처자식과 따뜻한 소찬 한상
그리 큰 욕심인지
황금빛 마차 구원의 손길은
기약 없이 기다리고 있건만
영접할 님 언제 오시려나.
위 시는 두보 초당의 돌에 새겨진 두보의 시(茅屋爲秋風所破歌)를 보고 감흥을 받아 써본 글이다. 두보는 이 시에서 가을 태풍에 다 무너져가는 초가집의 모습과 비가 새는 집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특유의 해학적 기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이 시에 쓰인 '태풍'을 자연현상으로 볼 수도 있으나, 실은 당시의 험난했던 시대 상황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앞에서 소개한 그림과 같이 전란 등으로 혼란한 상황에서 서민들이 고통받고 있는 모습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여기에서 '태풍'은 당시의 혼란한 정치적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했다고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사는 것은 마찬가지인가 보다. 물론 두보가 살았던 시대처럼 굶어서 또는 전쟁으로 수많은 목숨이 죽어 나가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도 끊임없는 정치권의 싸움으로 많은 사람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뉴스를 틀어보면, 끼리끼리 치고받는 싸움 때문에 정신이 사나워 정치 뉴스는 잘 보지 않는 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들이 진정 국민을 위해 싸우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정당마다 정강 정책이 있고, 이념적 지향점이 있어서 이를 관철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매사에 비판을 위한 비판인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물론 정권을 획득하는 것이 정당의 존재 이유라는 점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과정이 정당하지 못하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간다는 것을 명심했으면 한다.
또한 선거를 통해 많은 신인이 정당에 투입될 때마다 기대는 하지만, 기대가 기다림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 법에는 정당민주주의가 보장되어 있다. 이는 정당 내 민주주의도 포함하는 개념으로 알고 있는데, 신인들은 기득권 정치 세력에 너무도 쉽게 동화되어 버리기 일쑤다. 아마 4년 뒤 선거에서 공천을 보장받으려면 어쩔 수 없다고 항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국민의 대표가 아닌 특정 세력의 대표일 뿐이며, 정당 내에서 거수기와 나팔수 역할만 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고민이 많이 된다. 우리나라 일부 정치 세력들은 과연 우리나라 국민인지 아닌지. 아마, '이방인이겠지!'하고 느끼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희망이 보이냐고 물으면 쉽지 않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하이데거의 제자인 한나 아렌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살펴보자. 이 책은 특파원 자격으로 유대인 대량학살 최고 책임자인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기록한 내용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잔혹한 전범인 아이히만에 대해 악마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아렌트의 기록도 이러한 방향으로 나올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그녀의 기록은 유대인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녀는 아이히만을 악마로 그리지 않고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그녀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당시 독일인이라는 집단의식 속에서 행동한 것이지, 한 개인으로서 행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맞는 말이다. 그는 독일인의 일원으로서 일을 저지른 것이다. 물론 당시에는 그것이 독일인들의 당연한 소명이었을 것이다. 또한, 아이히만은 그저 평범하고 성실한 독일 시민 중 한 사람이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는 상부의 지시를 성실하게 실천하였고, 관료제 하에서 유대인 학살을 단순한 업무로 생각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녀의 기록에 대해 일부 유대인들은 크게 분노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악의 평범성과 집단성에 대한 그녀의 기록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본다.
케이스는 다르지만, 우리의 정치 구조에 있는 사람들이 과연 아이히만과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이방인이라 칭한 일부 정치인들은 자신들만의 리그(집단)에 몰입되어 그들이 국민의 대표라는 것을 잊고 있는 경우가 많다. 말도 안 되는 독설과 온갖 편법을 동원해서라도 리그가 보호해주니, 리그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리그의 지시가 있으면 개인적인 신념도 포기하기 일쑤다. 그러니 아이히만의 사례와 다를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 시점에서 아렌트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자.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행동은 한마디로 '사유의 부재'라고 결론을 지었다.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일을 단순한 업무로 생각했다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생명권에 대한 사유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말한다. 사유가 없는 정치는 사유가 없는 아이히만과 다를 바가 없다. 물론 정치뿐만 아니다. 우리 사회의곳곳은 사유의 부재로 신음하고 있다.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다들 알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병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유의 힘이 필요하다.
그러면 어떻게 사유의 힘을 기를 것인가? 이미 기성세대를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은 고쳐서 못쓴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교육과정이라도 바꿔야 한다. 문제 한 개라도 더 맞춰, 더 좋은 대학을 보내는 것이 중요한 시대는 지났다. 초중고 모든 과정에 사유를 키울 수 있는 의무 교육과정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고 본다. 어찌 보면, 교육과정의 50% 이상을 사유와 관련된 과정으로 채운다 해도 결코 많은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흥분이 된다. 인간에 대해서, 우주에 대해서, 생명에 대해서, 환경에 대해서 고민하고 토론하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을 상상하면 어찌 흥분되지 않겠는가? 이러한 사유가 철철 넘치는 사회가 만들어진다면, 우리 사회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병폐들이 조금씩은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