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잃어버린 나그네

3부. 내 가는 길은 공사 중

by 은파
고향이 사라졌다.

친구들과 뒷산에 오른다. 정월 대보름 이어서 그런지 일찍부터 보름달이 연못만큼 크게 떠 있다. 다들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던 깡통마다 나뭇가지를 가득 채우고, 산 정상 아래 널찍한 들판에 모였다. 가장 나이 많은 형이 '하나, 둘, 셋'을 외치자 모두 깡통에 불을 붙이고, 열심히 돌린다. 더 힘차게 돌릴수록 불이 더 잘 붙게 되어 있다. 일렬로 서서 다 함께 노래도 부르고, 소원도 빌고 그러면서 전진했다. 마지막은 깡통을 힘차게 던진다. 될 수 있으면 불이 붙지 않을 곳을 향해 던졌다. 하지만 그중 한 개가 바짝 마른 잔디밭에 떨어졌다. 깡통 속의 불쏘시개가 여러 곳으로 튕겨 나오자 이곳저곳에 불이 붙는다.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들어 불을 끈다. 쉽게 잡히지 않던 불길은 모두의 얼굴이 시꺼멓게 뒤범벅이 되었을 즈음에 잡혔다. 힘없이 주저앉아 한숨 쉬는 이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시지 않는다.

한여름 밤, 잠이 오지 않아 마루에 누워 하늘에 있는 별을 세고 있었다. 언젠가는 '저 별을 다 세야지' 하지만 늘 세다가 숫자를 까먹고 만다. 심심한 것을 눈치챘는지 아버지가 같이 산에 가자고 하신다. 좀 어두컴컴했지만, 지금이 가장 좋은 시간이다. 산에 올라 손전등을 나무마다 비춰가며 레이더를 돌린다. 튼튼한 나무보다는 부러졌거나 넘어져서 힘없이 버티고 있는 나무들을 주로 찾아다닌다. 이렇게 열심히 손전등과 작고 예리한 눈을 돌리다 보면 조그마한 움직임도 재빨리 알아차릴 수 있다. 1시간여 탐험 시간 동안 풍뎅이 한 마리밖에 잡지 못했지만 그래도 빈손이 아니니 나름 뿌듯했다. 집 근처에 이르렀을 때 풍뎅이가 들어 있는 깡통 속에서 '따다닥'하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뚜껑을 열어보니 풍뎅이 날개 하나가 떨어진 것 아닌가? 나도 모르게 눈물을 펑펑 흘렀다. 날개 하나가 없으면 다리에 실을 묶어도 풍뎅이는 날아다니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눈물 머금은 조그만 아이를 안고 달랜다. 내일 다시 오자고. 내일은 매미도 함께 잡아주겠다고. 그제야 울음을 그친다.


아득한 시절의 기억인데도 가끔 한 번씩 이러한 내용이 꿈에 나타난다. 어렸을 적 기억과 꿈속의 상상이 겹쳐서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꿈에서 깨어나면 옛 추억에 가슴이 먹먹해지곤 한다. 그 시절의 고향, 흙내음, 풍뎅이의 알싸한 냄새, 쥐불놀이 깡통의 불 향내, 노란 송홧가루가 가득한 우물, 아카시아 향이 가득한 아버지 술 항아리 등의 기억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 같다.


고향이 그리워 가끔 휴양림이나 편백숲 등을 찾아다닐 때가 있다. 운전하면서 가다 보면 눈 자체가 즐겁다. 조금 내린 차창 사이로 들어오는 깨끗한 공기가 그렇고, 푸르디푸른 하늘과 발을 담그면 금방 얼어버릴 듯한 냇가의 물이 온몸을 즐겁게 한다. 하지만 뒷좌석에 있는 아이들은 밖을 바라보지 않는다. 둘 다 손에 있는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서로 키득키득하며 시간을 잘도 보낸다. 밖 경치가 좋으니 눈 좀 돌려보라 하면 창밖을 잠시 째려보듯 하고, 이내 곧 눈은 다시 핸드폰 속으로 빠져버린다. 자연에 대한 감흥이라든지 추억이 전혀 없는 듯하다. 한편으로는 안타깝기 그지없다. 요즘 아이들은 고향을 잃어버린 아이들이다. 고향을 경험한 적이 없으니 자연에 대한 추억이 있을 수 있겠는가? 병원에서 태어나 큰 닭장과 같은 아파트에서 살면서 시멘트와 아스팔트만 밟으니 말이다. 학교 운동장도 예전과 비교해 절반 규모로 작아진 데다가, 아이들을 보호한다고 인조 잔디를 깐 운동장이 대부분이라 이곳에서도 자연 그대로의 흙을 밟아보긴 어렵다. 여행을 가도 리조트에서 모든 것을 해결한다. 그러면 이 아이들의 고향은 과연 어디일까? 고향에 대한 향수가 애초부터 만들어질 수 없는 아이들의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힘겨운 타향

낯선 얼굴들 사이로

깊은 고통을 뿜어내며

고향이 아닌 이 땅에서

아우성치고,

성스러움이 사라진 땅을

떠나고자 하나

반기는 이 하나 없다


해가 중천에 뜬 어느 날

거친 들판을 내달리자

마음속 깊이 묻혀 있던

속삭임을 타고

아주 먼 그곳 하늘에서

종달새가 노래하자

실핏줄처럼 얽혀있던

들샘들이 손짓한다


숲 속 작은 길, 안갯속

굴뚝새의 무거운 눈꺼풀은

비밀 속으로


깨어나지 않아도 좋다

따뜻한 흙 내음과

어머니의 손길만 있다면.




하이데거는 현존하는 우리 인간들의 삶이 실향민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비판한다. 인간은 본래 고향에 거주해야 하지만, 뿌리인 고향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귀향은 '근원에 가능한 한 가까이 돌아감'을 의미한다. 결국, 그에 따르면 고향이 없어지면 인간의 근원에 대한 이해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시대는 어떻게 고향 상실의 시대가 되었는가? 하이데거가 보기에 현대사회는 기술 신화 속에 빠져버려 인간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인간끼리도 서로가 도구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고향에서 멀어지면서 권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하이데거의 후기 저작에는 고향 회복이나 귀향을 권장하는 메시지들이 많다. 그는 고향을 회복하기 위해 들길에서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찾아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기술만능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요즘 아이들처럼 고향을 잃어가고 있다. 저녁 식사 후에는 가족 모두가 핸드폰 한 개씩 들고 고개를 숙이고 무엇인가에 몰두한다. 부부끼리도 침대에서 등을 대고 누워 조그만 핸드폰 속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가족은 필요할 때만 가족이다. 그 외의 것은 조그마한 핸드폰이 다 제공해준다. 정보도 주고, 재미도 주고, 편의도 제공해 준다. 그러면서 점점 가족 간 대화는 줄어든다. 언젠가는 의사소통도 핸드폰으로만 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이것은 하나의 사례를 극단화한 것일 수도 있지만, 우리의 삶은 모든 분야에서 이러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인간을 편하게 해 준다고 나온 기술들이 인간 존재의 근간을 갉아먹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으로 보아서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할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고향에 대한 사유를 들여다보면 희미하지만, 하나의 길이 조금씩 보이게 될 것이다. 우선 그러기 위해서는 핸드폰을 잠시 멀리하자. 아니 핸드폰이 없는 날을 정해서 실천해보자. 그렇게 해서 남는 시간에는 가까운 자연으로 들어가서 보내보자. 이러한 과정이 조금씩 반복되다 보면, 우리 아이들의 고향을 찾아낼 단서들이 나타날 수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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