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달린다

3부. 내 가는 길은 공사 중

by 은파
우리를 악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겸손이다
(by. 조나단 에드워즈).



갑자기 바빠진 일상.

그녀는 바삐 움직였다.

태스크포스 조직도 급히 만들고

위탁기관과 미팅도 하고

마을 주민들과 논의도 진행하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신발이 닳을 정도로 뛰었다.

잘하고도 싶었다.

토요일도 일요일도 출근했다.


아이들 얼굴을 본지 언제인지

밥도 챙겨주지 못하고

늘 저녁 식사를 배달시켜 먹는

아이들이 안쓰러웠다.

고 3 아이

학교에 가보지 못한지도 꽤 되었다.


어느 날 위탁기관 부서장이 목청을 높였다.

“태스크포스에 여자들만 있어 문제다.”

“전공 분야도 맞지 않는다.”

“홍보 팸플릿은 왜 이따위로 만들었냐?”

그보다 더 큰 사업을 20년 이상 해왔지만

이런 대우를 받은 일은 처음이었다.


“누구 백으로 이 사업에 참여했느냐?”

“갈 데가 없어서 자리를 만든 것 아니냐?”

하며 사업비도 제때 내려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사업 집행 속도가 늦다고 난리다.

갈수록 짖어 대는 컹컹 소리에

스트레스는 계속 쌓여만 갔다.


그들 뜻대로 사업을 반납할까도 했었지만

회사 입장도 있고 해서 더 열심히 했다.

“다 잘했다. 너무 잘하고 있다.”라며

위탁기관 직원들은 자기 부서장이

왜 괴롭히는지 자기들도 모르겠단다.


어느 날부터는 직원들도 같이 윽박질렀다.

불러서 가보면 부서장 눈치를 보며

죄인 취급하며 한술 더 떠 윽박지른다.

“왜 이따위로 밖에 못 하느냐?”

죽기보다 힘들었다.

차라리 죽고 싶었다.

그래도 더 이를 악물고 뛰었다.


짧은 시간 동안 일을 잘 끝냈다.

분야별로 여러 개의 상도 받았다.

그런데 개는 오히려 더 날뛰었다.

“너희 때문에 상을 더 받을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이게 다 너희 때문이다.”

다른 분야는 그녀의 업무 소관도 아니었다.

자기들이 잘 못 해놓고 또 난리다.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어느 날 어금니가 부러졌다.

아침에 출근하다가 문 앞에서 쓰러져

병원에서 링거를 맞은 적도 있었다.

그런 생활이 계속되면서

아침에 눈을 뜨기가 무서웠다.


저녁엔 다음 날 걱정에 잠도 오지 않았다.

그래도 아이들을 보면 사랑스러워

눈물을 머금고 아침마다 꼭 안아 주었다.

“엄마 왜 울어?”

“무슨 슬픈 일 있어?”

그런 아이들을 좀 더 자라고 하고

출근하곤 했다.

‘아침은 먹고 학교에 가는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갑자기 위탁기관 부서장이 바뀌었다.

모든 상황은 변했다.

일상은 예전처럼 정상적으로 바뀌었다.

그런데도 마음은 계속 불안하였다.

불면증은 껌딱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아침에 출근하는 것이 겁이 나기 시작했다.

회사 가는 게 무서웠다.

사람 만나는 게 무서웠다.

남편 설득에 병원에도 가보았다.

‘공황장애.....’


남편은 건강을 위해 회사를 그만두란다.

어떻게 해서 이 자리까지 왔는데

쉬었으면 좋겠다는 남편이 한편 얄미웠다.

약을 먹으면 잠시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약발이 떨어지면 가슴은 다시 떨려왔다.


대화가 없어졌다.

남과 말을 섞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인생 별것 있어?”

“그냥 부딪혀 보는 거지.”

“건강을 잃으면 가족도 잃고, 인생도 잃는 거야.”

“항상 당신 편인 거 알지?”

남편의 말에 눈물만 흘렀다.

함께 마음고생도 했고

한편 서운함도 있었지만

이렇게 말해주니 고마웠다.


용기를 내어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지금까지 삶과 방향은 다르지만

새로운 삶을 결심하니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세상에 산재한 개새끼들을

이제는 만나지 않아도 된다.’라고

생각하니 잠도 잘 오기 시작했다.


사기꾼, 늑대의 탈을 쓴 군상들이 스쳐 지나갔다.

여자가 뭐가 문제인데 하는 생각도 잊기로 했다.

이제 열린다.

새로운 시작이 열린다.

누군가는 그만둔다고 하니,

추방된 거 아니냐고 해서 맞받아쳤다.

‘추방이 아니고 해방된 거다.’라고.

우리들의 그녀.

딸, 아내, 엄마인 그녀.


옮겨간 그 부서장은 지금도 모사를 꾸미고 있다.

그 사람은 지금도 존경받는 과장님이고

앞으로도 쭉 인정받는 과장님일 거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검붉은 하늘에서 뜨거운 빗줄기가 내린다.

세상 속 미세먼지를 모두 닦아줄 기세로.




윗글은 직장 갑질 때문에 사표를 내게 된 사람의 사연을 듣고 '그녀는 달린다'라는 제목으로 써본 내용이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고질적인 문제는 ‘갑질’이라 단언해도 절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 곳곳에 갑질 문제가 만연되어 있고, 우리 모두 부지불식간에 행하는 행동들도 갑질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우리가 하는 행동들이 마치 옷을 입은 것처럼 우리 몸에 착 달라붙어 있어, 그것이 갑질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뿐이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는 대한민국 헌법 제10조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존엄성은 자연법상의 당연한 권리에 해당한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인간이 사는 삶의 현장은 치열한 경쟁의 장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힘의 불균형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힘의 불균형 구조 속에서 갑과 을은 숙명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물론 이러한 갑과 을의 숙명이 반드시 갑질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를 악의적으로 활용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어떤 경우에는 부모로부터 잘못 배워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갑질의 중심에 서 있는 경우도 있다.

갑질 문제는 인류 탄생과 함께 모든 나라에서 항상 있었지만, 유독 우리나라에서 더 심각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유교 사상이 그 원인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고려 시대에 도입된 유교는 조선 시대에 꽃을 피웠지만, 한편으로는 군신 간의 권력 관계, 나이 차이에 의한 간접적 지배 관계, 남녀 차이에 따른 육체적 우열 관계 등을 명목으로 심리적인 강제성을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유교는 우리 사회에서 730여 년간 한국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해왔지만, 조선 시대에 이르러 유교적 교리의 형식적 해석에 치중하다 보니 지금의 갑질 문제와도 긴밀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즉,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각종 상하 관계(직장, 가정, 학교, 친교 모임 등), 투표에 의한 주권의 한시적 양도 관계를 권력 관계로 착각하는 정치적 지배 관계, 시험을 통해 공직을 부여받은 공직자의 사적 지배 관계 등에는 유교적 관계를 왜곡한 근본적인 악의 축이 내재하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라 사상 결핍에 따른 정신적 천박함이 갑질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나라는 아쉽게도 우리 자체의 사상을 제대로 키워내지 못했다. 물론 시대별로 위대한 학자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이 중국의 유교, 도교 사상 등을 수입해서 배워왔고 근현대 시대에 와서는 서양철학을 받아들여 배웠다. 비록 우리 자체적으로 키워낸 사상은 아니지만,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우리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경제성장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사회 곳곳에 퍼져있는 갑질 등의 고질병은 더욱더 커져만 가고 있으며, 이러한 부담들이 점차 국가 경제에 짐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수십 년간 경제발전을 위한 기계들을 학교에서 집중적으로 양성해 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인가 하는 사람됨 교육은 공교육에서 사실상 사라졌고, 공부하는 기계를 양성하다 보니 우리의 사상적 결핍은 그야말로 심각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가슴이 없는 사람, 사유가 없는 사람, 이러한 사람들은 타인을 하나의 기계로 보고 마음껏 짓밟으면서 돈만 벌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 외에도 우리 편이 아니면 따돌리는 ‘끼리끼리 문화’ 그리고 부모에게 어려서부터 갑질을 배워왔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갑질이 몸에 체화된 ‘유전적 갑질’도 갑질 문화의 큰 뿌리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갑질 문화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우리 사회 시스템이 전체적으로 바뀌지 않고서는 어떠한 것도 근본적인 처방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분노하라! 행동하라!

하이데거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운명의 '상호 공동 존재'라고 보고 있다. 인간은 타인과 그물과 같은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상호 공동 존재는 서로 의식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관계 속에서 타인의 통치에 일정 부분 예속되기도 한다. 여기에서 하이데거는 개인의 결단을 요구한다.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어느 정도까지는 남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지만, 인생의 중요한 국면에서는 참지 말고 결단을 하라는 것이다. 쉽게 설명해보면 상호 공동 존재의 예속 관계가 갑질에 해당하지 않으면 자신을 낮추고 따라야 하겠지만, 예속 관계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갑질에 해당할 정도로 엄중한 상황이라면 결단을 내리고 자신을 최우선으로 하는 선택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만으로 갑질 문제를 단절시킬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 교육시스템의 변화와 우리 사회의 철학적 투자 확대만이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공교육의 정상화가 절실하다고 본다. 오늘날 많이 개선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 교육은 시험을 잘 보는 기계를 양성하는 과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하에서 사람으로서 해야 할 도리와 타인에 대한 배려 등의 교육은 꿈도 꾸지 못한다. 흔히들 전인교육이 중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구호에 그칠 뿐, 학교 현장에서는 전혀 침투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먼저 움직여야 한다. 교육자치란 명목하에서 교육감들에게만 맡겨 놓는 것은 국가가 당연히 해야 할 책무를 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국가 최고 지도자의 전인교육에 대한 강력한 의지, 교육 관련 부처의 전인교육 로드맵 수립, 학부모들의 의식 개혁을 위한 투자 확대 등이 병행되어야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성인들에 대한 철학적 투자도 지속해서 확대하여야 한다. 앞에서 살펴본 우리의 갑질 문화는 사유를 통하지 않고서는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하지만 기계적 학습을 받고 사회에 나와 있는 기성세대를 바꾸기란 쉽지 않은 문제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간단하다. 사회에 산재하는 모든 조직(기업, 정부, 공동체, 종교적 활동 단체, 가족 등)에서 사유가 충만한 문화가 싹틀 때까지 국가적인 관심과 투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각 영역에서 추진되고 있는 교육 투자 예산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했으면 한다. 이를 바탕으로 불필요한 예산을 절감하여 사유에 대한 재교육 예산으로 편성했으면 한다. 이러한 투자를 통해 자신에 대한 관점, 타인에 대한 관점, 국가와 사회에 대한 관점 그리고 세계와 우주에 대한 성인들의 관점을 재정립했으면 한다. 내가 존중받듯이 타인도 존중받을 가치가 있으며, 인간이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면, 자연과 우주의 모든 생명체도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는 점을 확신하게 될 때 갑질이라는 병폐도 자연스레 소멸하지 않겠는가? 물론 이러한 실천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이러한 논의를 시작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다시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리라는 것도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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