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파 Oct 19. 2024

9/11의 공포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맑은 가을 하늘을 가르는 비행기 소리가 들렸다.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김승제는 여느 때처럼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듣다 말고 그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세계무역센터에 비행기가 충돌했다는 소식이었다.

처음에는 단순 사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비행기가 충돌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순간 승제는 이것이 단순 사고가 아님을 직감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동료들, 친구들, 그리고 수많은 뉴욕 시민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사무실로 향하는 길, 거리는 이미 혼돈 그 자체였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공포와 불안이 가득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 하늘을 뒤덮은 검은 연기. 승제는 순간 광주의 그날을 떠올렸다. 20년 전 겪었던 공포가 다시 그를 덮치는 듯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모든 직원이 텔레비전 앞에 모여 있었다.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참사의 현장을 보며 모두가 말을 잃었다.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는 순간, 승제의 마음 한편에서도 무언가가 무너져 내렸다. 그동안 쌓아온 안정감, 이 도시에 대한 신뢰, 그리고 미국에 대한 환상.

그날 이후 뉴욕은, 아니 미국 전체가 변했다. 거리 곳곳에 경계 태세가 강화되었고, 사람들의 눈빛은 늘 불안에 차 있었다. 특히 중동계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그들을 향한 적대감과 공포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승제는 이런 변화를 지켜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중동계 사람들을 경계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을 질책했다. 한때 자신도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 자신이 이제는 다른 이들을 차별하고 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법조계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테러와의 전쟁이 선포되면서 안보 관련 법안들이 쏟아져 나왔다. 시민의 자유와 안전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다. 승제는 이런 변화 속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고민했다. 법조인으로서, 그리고 이민자 출신으로서 그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어느 날, 승제는 한 중동계 남성의 사건을 맡게 되었다. 그는 테러 용의자로 지목되어 부당하게 구금된 상태였다. 증거는 미약했지만, 그의 출신과 종교만으로 그는 이미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승제는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시험받게 되었다.

사건 조사를 위해 구치소를 방문한 날, 승제는 그 남성을 처음 만났다. 철창 너머로 보이는 그 사람의 모습은 승제의 예상과는 달랐다. 그는 공포의 대상이 아닌, 그저 평범한 한 인간이었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함께 간절한 호소가 담겨 있었다.

면회를 마치고 나오는 길, 승제의 마음은 무거웠다. 이 남성의 이야기를 들으며 승제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낯선 땅에서 차별과 편견에 맞서 싸워야 했던 그 시절. 이제는 그의 처지가 바뀌어, 누군가를 돕는 역할에 서게 되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승제는 밤늦게까지 관련 자료들을 검토했다. 테러 관련 법규, 인권 협약, 과거의 유사 판례들. 모든 것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 과정에서 그는 점점 더 확신을 품게 되었다. 이 남성은 무고하다는 것, 그리고 이 사건이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편견과 공포의 산물이라는 것을.

변론을 준비하면서 승제는 여러 난관에 부딪혔다. 동료 변호사 중 일부는 이 사건을 맡는 것을 만류했다. 테러 용의자를 변호하는 것은 위험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비난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승제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에게 이 사건은 단순한 법적 문제를 넘어, 정의와 인권에 대한 시험대였다.

재판이 시작되고, 승제는 온 힘을 다해 변론했다. 그는 피고인의 무고함을 입증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 사건의 근저에 깔린 사회적 편견과 공포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의 열정적인 변론에 법정은 때로는 숙연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격렬한 논쟁으로 가득 찼다.

재판 과정은 길고 힘들었다. 여러 차례 기각 신청을 당하고, 언론의 비난에 시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승제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이 사건이 단순히 한 개인의 운명을 넘어, 미국 사회의 가치관을 시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마침내 최종 변론의 날이 왔다. 승제는 법정에 선 그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그리고 배심원 여러분. 우리는 지금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이 재판의 결과는 단순히 한 개인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지, 어떤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 될 것입니다. 9/11 테러는 우리에게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하지만 그 상처로 인해 우리의 가치관마저 무너뜨려서는 안 됩니다. 공포에 굴복하여 무고한 이를 희생양으로 삼는다면, 그것이야말로 테러에 대한 패배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승제의 열변은 계속되었다. 그는 피고인의 무고함을 입증하는 증거들을 하나하나 제시하며, 동시에 이 사건의 본질이 단순한 범죄 문제가 아닌 사회적 편견과 공포의 산물임을 강조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있었지만, 그 속에 담긴 확신과 열정은 법정을 울렸다.

최종 변론을 마치고 자리에 앉은 승제의 가슴은 뜨거웠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고 느꼈다. 이제 남은 것은 재판부의 판단을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며칠 후, 마침내 판결이 내려졌다. 피고인에 대한 무죄 판결. 승제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그것은 단순한 법적 승리를 넘어, 정의와 인권의 승리였다. 판결문에서 재판부는 이 사건이 가진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공포와 편견에 기반한 판단의 위험성, 그리고 법치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재판이 끝나고 승제는 석방된 의뢰인과 마주했다. 그의 눈빛에는 감사와 안도의 빛이 가득했다. 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껴안았다. 그 순간 승제는 깨달았다. 자신이 왜 법조인의 길을 선택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변호사가 되어야 할지를.

이 사건은 승제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그의 이름은 인권 변호사로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비슷한 처지의 의뢰인들이 그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보수적인 단체들의 비난과 협박, 때로는 물리적 위협까지. 승제는 이 모든 것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승제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더욱 강한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9/11 이후의 공포와 혼란 속에서, 누군가는 반드시 정의와 인권을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바로 자신이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이 시기에 승제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더 깊이 성찰하게 되었다.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그리고 이민자 출신 변호사로서 그가 가진 특별한 위치와 책임에 대해 고민했다. 그는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이 단순한 개인사를 초월하여, 사회적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어느 날, 승제는 한 대학에서 강연 요청을 받았다. 주제는 "9/11 이후의 미국 사회와 인권"이었다. 강단에 선 그는 자신이 겪어온 경험과 깊은 사유를 진솔하게 털어놓았다. 광주에서의 기억, 이민자로 살아온 삶, 그리고 9/11 이후 변화와 갈등 속에서 씨름해온 이야기들. 그의 이야기는 청중들의 마음을 깊이 울렸다.

강연 후, 한 학생이 다가와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용기 있는 선택을 하실 수 있었나요?"

      

승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천천히 대답했다.

     

"그것은 단순히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겪어온 모든 경험이 저를 그 자리에 세운 것이었습니다. 광주에서의 기억, 이민자로서의 고난, 그리고 법조인으로서 느낀 사명감. 이 모든 것이 저를 만들어냈고, 그래서 저는 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강연을 계기로 승제는 그의 경험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기로 결심했다. 그는 책을 쓰기 시작했다. '경계에 선 자의 시선'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승제는 자신의 인생 여정을 솔직하게 풀어냈다. 광주에서의 아픔, 이민자로서의 고난, 9/11 이후의 혼란, 그리고 그 속에서 찾은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

책을 쓰는 과정은 승제에게 또 다른 자기성찰의 기회가 되었다.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고 정리하면서, 그는 그동안의 삶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도움과 희생 위에 세워졌는지를 깨달았다. 부모님의 헌신, 스승들의 가르침, 동료들의 지지, 그리고 의뢰인들의 신뢰. 모든 것이 그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어왔다.

책이 출간되자 예상 밖의 반응이 쏟아졌다. 많은 이들이 승제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위로받았다. 특히 이민자 2세들과 소수자들에게 그의 책은 큰 울림을 주었다. 그들은 승제의 이야기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했고, 새로운 희망을 얻었다.

하지만 동시에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다. 일부에서는 그가 너무 이상주의적이라고 비난했고, 또 다른 이들은 그의 성공이 '모범적 소수자'의 틀에 갇혀 있다고 지적했다. 승제는 이 모든 반응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만의 경험이 완벽하거나 유일한 것이 아님을 인정했다. 오히려 이런 비판들이 더 깊은 대화와 성찰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책의 성공 이후, 승제에게는 더 많은 기회가 찾아왔다. 여러 대학과 기관에서 강연 요청이 쏟아졌고, 미디어에서도 그를 찾았다. 승제는 이런 기회들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더 널리 전하고자 했다. 그의 핵심 메시지는 명확했다. 공포와 편견을 넘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그러나 이런 활동들이 늘어나면서 승제는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변호사로서의 본업과 사회 활동 사이에서 균형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더 큰 영향력을 위해 정치에 입문해야 하는가? 아니면 학계로 진출해 더 깊이 있는 연구를 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이 그를 밤새 괴롭혔다.

     

이 시기에 승제는 또 다른 중요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의 부모님이 한국으로 영구 귀국을 결정한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커졌다는 것이 이유였다. 승제는 부모님의 결정을 존중했지만, 한편으로는 큰 상실감을 느꼈다. 부모님은 그에게 미국에서의 뿌리이자 정신적 지주였다. 그들의 부재는 승제에게 또 다른 정체성의 위기를 가져왔다.

부모님을 배웅하는 날, 공항에서 승제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기쁨과 슬픔, 안도와 불안이 뒤섞였다. 어머니는 떠나기 전 승제의 손을 꼭 잡고 말씀하셨다.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우리는 항상 네 편이란다. 하지만 잊지 마라. 네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이 말은 승제의 가슴 깊이 새겨졌다.

부모님의 한국 귀국은 승제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이제 그는 완전히 혼자서 미국에서의 삶을 꾸려나가야 했다. 동시에 이는 그에게 한국과의 연결고리를 더 강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승제는 정기적으로 한국을 방문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한국인으로서의 뿌리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한국 방문 중 승제는 우연히 광주를 다시 찾게 되었다. 20년 만의 방문이었다. 도시는 많이 변해 있었지만,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했다. 5.18 민주화운동 기념공원을 찾은 승제는 오랫동안 묵념을 했다. 그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자, 동시에 새로운 다짐의 눈물이었다.

     

광주 방문 후 승제는 더욱 확고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만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한미 양국의 가교역할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한국의 인권 단체들과 협력하기 시작했고, 미국 내 한인 커뮤니티와 주류 사회를 연결하는 프로젝트들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정체성이 약점이 아닌 강점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런 활동들을 하면서 승제는 점점 더 큰 그림을 보게 되었다. 9/11 이후의 공포와 혼란은 비단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전 세계가 비슷한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테러와의 전쟁, 난민 문제, 인종 갈등 등. 이런 문제들은 한 국가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승제는 이런 국제적 문제들에 더 깊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는 UN 인권위원회의 자문 위원으로 활동하게 되었고, 여러 국제 컨퍼런스에서 연사로 초청받았다. 이 과정에서 그의 경험과 지식이 단순히 개인 차원을 넘어, 더 넓은 사회적 맥락에서 깊은 의미가 있을 수 있음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그의 이야기가 다른 이들에게도 공감과 위로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큰 감동을 안겼고, 그러한 인식은 그의 삶에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해주었다.

그러나 이런 활동들이 늘어나면서 승제는 또 다른 딜레마에 직면했다. 국제무대에서의 활동이 늘어날수록, 정작 자신이 속한 지역 사회와의 연결이 약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는 한국인으로서의 뿌리를 잃지 않으면서도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방법을 고민했다.

이 시기에 승제는 개인적인 삶에서도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 오랫동안 일에만 몰두하느라 미뤄왔던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그의 아내 역시 한국계 2세로, 자신과 비슷한 경험과 고민을 겪은 여성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배경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새로운 가정을 꾸려나갔다.

결혼 생활은 승제에게 또 다른 차원의 성찰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인권 변호사로서의 일과 사명에 대해 가족과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게 되었다. 아내는 그의 든든한 지원자이자 조언자가 되어 주었다. 동시에 가정이라는 안식처는 승제에게 새로운 힘과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승제는 점점 더 자신의 역할에 대해 명확한 비전을 갖게 되었다. 그는 단순히 법정에서 싸우는 변호사를 넘어, 사회의 다양한 영역을 연결하는 가교가 되고자 했다. 법조계와 학계, 시민사회와 정부, 그리고 국가 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승제가 꿈꾸는 미래였다.

이러한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승제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그는 로스쿨에서 강의를 맡게 되었고, 동시에 인권 관련 싱크탱크를 설립했다. 이를 통해 그는 법조인으로서의 경험과 지식을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고, 동시에 사회 변화를 위한 실질적인 정책들을 연구하고 제안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성공과 인정 속에서도 승제의 마음 한편에는 늘 불안과 고민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자신이 정말 옳은 일을 하는 것인지, 더 많은 것을 할 수는 없는지, 그리고 과연 자신의 노력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특히 9/11 이후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승제는 더욱 깊은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테러와의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인종 차별과 혐오는 오히려 더 심해진 것 같았다. 때로는 자신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 것 같아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승제는 자신이 처음 변호했던 중동계 남성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 남성은 이제 미국 시민이 되어 지역 사회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승제의 도움이 없었다면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편지는 승제에게 큰 위안과 격려가 되었다. 비록 세상을 한 번에 바꿀 수는 없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것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승제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법조인으로서의 일에 임하게 되었다. 그는 큰 변화를 꿈꾸면서도 동시에 눈앞의 작은 일들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매일 만나는 사람들, 매일 다루는 사건들. 이 모든 것들이 결국 더 큰 변화로 이어질 것이라 믿었다.

2011년, 9/11 테러 10주년을 맞아 승제는 중요한 연설을 하게 되었다. 뉴욕 시청에서 열린 이 행사에서 그는 지난 10년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했다. 그의 연설은 화해와 포용, 그리고 희망의 메시지로 가득했다.

     

"우리는 10년 전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상처를 핑계로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공포와 증오는 결코 해답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존중, 그리고 용기입니다. 용기 있게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용기 있게 대화의 장을 열며, 따뜻한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야 합니다. 우리의 다양성은 약점이 아닌 강점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더 강하고, 더 정의로우며, 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승제의 연설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많은 이들이 그의 메시지에 공감하고 희망을 얻었다. 하지만 동시에 일부에서는 여전히 그를 비판했다.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라는 비난도 있었다. 승제는 이 모든 반응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이 한 말이 완벽한 해답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다만 이것이 대화의 시작점이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연설 이후, 승제는 더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는 다양한 커뮤니티 리더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고, 화해와 협력을 위한 프로젝트들을 시작했다. 특히 젊은 세대들과의 소통에 힘을 쏟았다. 그들의 새로운 시각과 에너지가 사회 변화의 핵심이 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이 조금씩 결실을 보기 시작했다. 커뮤니티 간의 대화가 늘어났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물론 여전히 갈등과 차별은 존재했지만, 변화의 조짐은 분명했다.

2011년 말, 승제는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뉴욕 시장실에서 인권 담당 특별 자문관직을 제안한 것이다. 이는 그에게 큰 고민거리였다. 공직에 진출한다는 것은 그의 활동 영역을 더욱 넓힐 기회였지만, 동시에 많은 제약도 따를 것이었다.

긴 고민 끝에 승제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는 이를 통해 자신의 이상을 현실 정책으로 구현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물론 쉽지 않은 도전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준비되어 있었다.

새로운 직책을 맡으며 승제는 자신의 여정을 돌아보았다. 광주에서의 아픈 기억으로 시작된 그의 삶이 이제는 뉴욕시의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자신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승제는 조용히 기도했다. 광주의 희생자들, 차별에 맞서 싸운 이들, 그리고 9/11의 희생자들을 위해. 그리고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위해. 그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시작점에 서 있을 뿐이었다.

이제 승제의 앞에는 새로운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두려움보다는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만의 경험과 지식, 그리고 신념을 바탕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 바로 승제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