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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파 Oct 26. 2024

물결 위에 그리는 예술

파리의 하늘은 물감을 풀어놓은 듯 여러 색채로 물들어 있었다. 민수가 비행기에서 내려 샤를 드골 공항의 땅을 밟는 순간, 그는 마치 거대한 캔버스 위에 발을 디딘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공기 중에는 빵 굽는 향과 꽃향기, 그리고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예술의 향기가 뒤섞여 있었다.

     

"여기가 파리구나."

      

민수는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경외감이 묻어났다.     

택시를 타고 도심으로 향하는 동안, 민수의 눈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오스만 양식의 건물들, 카페테라스에 앉아 있는 사람들, 센 강 위로 떠 있는 유람선들. 모든 것이 그림 같았다. 아니, 어쩌면 이 도시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인지도 몰랐다.

     

"안녕하세요, 어디로 모실까요?"

      

택시 운전사가 물었다.     

민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특별히 정해진 목적지가 없었다. 그저 이 도시가 그에게 무언가를 보여줄 것이라 믿었다.

      

"몽마르트르로 가주세요."

      

그는 마침내 대답했다.

     

택시가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자, 민수는 창밖으로 펼쳐지는 파리의 전경에 넋을 잃었다. 지붕들의 물결, 멀리 보이는 에펠탑,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 안은 듯한 부드러운 빛. 그는 문득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워졌다.

택시에서 내린 민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몽마르트르의 공기는 달콤하면서도 약간 쌉싸름했다. 마치 이 언덕 위에서 수 세기 동안 그려진 모든 그림의 물감 냄새가 공기 중에 스며있는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좁은 골목길, 아기자기한 상점들, 그리고 곳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들. 모든 것이 새로웠지만, 동시에 묘하게 친숙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꿈속의 풍경 같았다.     

그때였다. 한 남자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남자는 광장 한편에 앉아 캔버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붓을 들지 않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는 깊은 고뇌가 서려 있었다.

     

호기심에 이끌려 민수는 그에게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그림을 그리고 계신 건가요?"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민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깊은 절망이 어려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말라버린 물감 튜브 같았다.

      

"아, 그림이라······. 더 이상 그리지 않습니다."

      

민수는 놀랐다.

      

"왜죠?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남자는 쓸쓸히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마치 찢어진 캔버스 같았다.

      

"영감을 잃었어요. 한때는 이 도시의 모든 것이 내 그림의 소재였죠.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무의미해 보여요."

      

민수는 가슴 속 작은 별을 떠올렸다. 그 작은 빛이 이 화가에게도 있을까?

      

"그림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제 삶 그 자체였죠,"

      

화가가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그리움이 묻어났다.

      

"세상을 색으로 표현하고, 감정을 형태로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제가 숨 쉬는 이유였어요.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회색으로 보여요."

      

민수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런데 말이에요, 당신이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고 해서 당신이 화가가 아닌 건 아니잖아요? 당신의 눈은 여전히 세상을 그림으로 보고 있어요."

      

화가의 눈이 반짝였다. 마치 오랫동안 숨겨두었던 물감이 튜브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네,"

      

민수가 대답했다.

      

"제 이름은 민수이고 한국에서는 우체부로 일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세상의 이야기를 찾아 여행 중인 사람이에요."

      

화가는 처음으로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마치 새롭게 펼쳐진 캔버스 같았다.

      

"저는 피에르예요. 세상의 이야기를 찾아 여행 중인 사람이라······. 그것도 일종의 예술이네요."

      

그들은 함께 센 강변을 걸었다. 해가 지고 있었고, 강물은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치 모네의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 같았다.

피에르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그림을 그리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었다고 했다. 파리의 예술학교를 졸업하고 화가로서의 삶을 시작했지만, 점점 상업적인 압박과 비평가들의 냉혹한 평가에 지쳐갔다고 했다.

     

"제 그림이 제 것이 아닌 것 같았어요,"

      

피에르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후회와 슬픔이 묻어났다.

      

"다른 사람들의 기대와 평가에 맞추다 보니, 제가 진정으로 그리고 싶은 그림을 잃어버렸어요."

      

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그가 한국에서 느꼈던 답답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든 예술가, 아니 모든 사람이 겪는 고민일지도 몰랐다.

     

"때로는 내 안의 색채가 모두 사라져버린 것 같아요,"

      

피에르가 말을 이었다. 그의 눈빛은 흐릿했다.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지만, 제 눈에는 더 이상 그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아요."

      

민수는 별처럼 반짝이는 눈빛으로 피에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당신 안에는 여전히 예술이 살아있어요. 그렇지 않나요?"

      

피에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표정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아요."

      

그들은 루브르 박물관 앞에 도착했다. 거대한 유리 피라미드가 황혼의 빛을 받아 신비롭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한 곳에서 만나는 것 같았다.

     

민수는 피라미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세요. 저 피라미드를. 겉으로 보기에는 차갑고 현대적이지만, 그 안에는 수 세기에 걸친 예술의 역사가 숨 쉬고 있잖아요. 당신의 예술도 그럴 거예요. 겉으로는 잊힌 것 같아도, 당신 안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을 거예요."

      

피에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 눈물은 마치 팔레트 위의 물감 방울 같았다.

      

"정말 그럴까요?"

      

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진정한 예술은 영혼의 언어를 말하는 거예요."

      

그 순간, 루브르의 조명이 켜졌다. 피라미드를 통해 박물관 내부의 불빛이 새어 나왔다. 마치 거대한 등대처럼, 그 빛이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어쩌면,"

      

민수가 말을 이었다.

      

"당신의 예술은 이 도시 자체일지도 몰라요. 일상의 순간들, 사람들의 표정, 강물의 흐름······. 그 모든 것이 당신의 캔버스가 될 수 있어요."

      

피에르의 눈이 반짝였다. 그의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붓을 잡은 것처럼.

      

"그럴지도 몰라요. 이 도시는 매 순간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있죠. 내가 그것을 캔버스에 담아낼 수 있다면······."

      

민수는 미소 지었다.

      

"그래요. 당신은 할 수 있어요. 이 도시의 숨결을 당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당신만의 특별한 예술일 거예요."

      

그들은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피에르는 자신이 꿈꾸는 그림에 대해 열정적으로 말했고, 민수는 자신의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새로운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날이 밝아올 무렵, 그들은 몽마르트르 언덕에 올랐다. 파리의 전경이 발아래 펼쳐졌다. 민수의 눈에는 모든 것이 한 폭의 그림처럼 보였다. 회색 지붕들 사이로 아침 햇살이 금빛 물감처럼 번지고 있었다.

     

"고마워요, 민수 씨,"

      

피에르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새로운 활력이 넘쳤다.

      

"당신 덕분에 제 안의 예술가가 다시 깨어난 것 같아요."

      

민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 예술가는 원래 당신 안에 있었어요. 제가 한 일은 그저 당신에게 그것을 상기시켜 준 것뿐이에요."

      

피에르는 주머니에서 작은 스케치북을 꺼냈다.

      

"이건 제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스케치북이에요. 이제부터 이 안에 매일의 순간들을 담을 거예요. 언젠가 이것들이 모여 하나의 큰 작품이 될 거예요."

      

민수는 미소 지었다.

      

"기대하고 있을게요. 꼭 보고 싶어요, 당신의 예술을."

      

그들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피에르는 화실로, 민수는 다음 여정을 위해 기차역으로 향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기차에 오르며 민수는 생각했다.

      

'어쩌면 모두가 예술가일지도 몰라. 우리의 인생이 곧 우리의 작품이니까.'

      

창밖으로 파리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에펠탑, 개선문, 노트르담 성당. 그리고 그 속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어 그림을 그리고 있을 피에르.

     

민수는 자신의 노트를 꺼내 썼다.

      

"파리에서 나는 영감을 잃은 화가를 만났다. 하지만 그의 예술혼은 사라진 게 아니었다. 그저 잠시 잠들어 있었을 뿐. 우리는 모두 각자의 예술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예술은 언제나 우리 안에 살아있다."

      

기차가 파리를 벗어나며, 민수는 창밖으로 마지막으로 도시를 바라보았다. 아침 햇살에 물든 도시가 마치 거대한 인상파 그림처럼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가슴 속 별이 더욱 밝게 빛났다. 이제 그 별은 단순한 동경이 아닌, 그의 영혼을 비추는 예술의 빛이 되어 있었다. 

기차가 속도를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민수는 눈을 감았다. 귓가에는 여전히 파리의 거리 음악이, 코끝에는 센 강의 향기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마음속에는 피에르와 나눈 대화가 울려 퍼졌다.

     

'진정한 예술은 영혼의 언어를 말하는 거예요.'

      

민수는 미소 지었다.

      

기차는 계속해서 달렸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변하듯, 민수의 마음속 풍경도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파리의 예술적인 거리에서 그는 자신만의 색채를 발견했다. 그 색채는 이제 그의 영혼에 스며들어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민수는 노트에 또 한 줄을 적었다.

      

"예술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는 피에르를 생각했다. 그가 지금 무엇을 그리고 있을지 궁금했다. 아마도 파리의 거리에서 새로운 영감을 찾아 캔버스를 채우고 있을 것이다. 언젠가 피에르의 전시회가 열릴 날을 상상하며, 민수는 가슴이 설렜다.

기차가 잠시 정차했다. 창밖으로 작은 시골 마을이 보였다. 평화로운 풍경이 파리와는 사뭇 달랐다. 민수는 문득 생각했다.

     

'모든 장소에는 그 장소만의 예술이 있구나. 파리의 예술이 있듯, 이 작은 마을에도 그들만의 예술이 있겠지.'


그는 노트에 또 한 줄을 적었다.

      

"세상의 모든 곳이 예술의 소재가 될 수 있다."

      

기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민수는 이제 다음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민수는 가방에서 피에르가 준 작은 선물을 꺼냈다. 그것은 작은 물감 튜브였다.

      

"파리의 색을 담은 거예요,"

      

그가 말했었다. 민수는 그 튜브를 들여다보았다. 작고 단순해 보이는 물감이었지만, 그 안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민수는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이런 작은 물감 튜브 같은 존재인지도 몰라. 겉으로 보기에는 작고 평범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무한한 색채와 이야기가 담겨 있는······.'

      

기차는 계속해서 달렸고, 민수의 여정은 계속되었다. 그의 가슴 속 별은 더욱 밝게 빛나고 있었다. 이제 그 별은 단순한 동경이 아닌, 그의 영혼을 표현하는 예술의 원천이 되어 있었다.


민수는 창밖으로 흐르는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여행이 끝나면 나는 어떤 그림을 그리게 될까? 어떤 색채로 내 인생을 채색하게 될까?'

      

그 대답은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었다. 이 여행이 그의 인생을 하나의 걸작으로 만들어갈 거라는 것. 그리고 그 작업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

기차는 계속해서 달렸다. 파리는 이제 멀리 뒤로 사라졌지만, 그곳에서의 경험은 민수의 마음속에 선명한 붓 터치로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앞으로의 여정에 새로운 색채를 더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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