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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거 Jul 24. 2015

목수의 꽃

그는 꽃을 보고 있었다. 문득 둘은 닮았다고 느꼈다. 화사하게 핀 꽃을 지탱하는 짙은 연두색의 가느다란 허리가 그가 지고 있는 세월만큼 굽어보였다. 그는 지긋이 꽃을 바라볼 뿐이었다. 꽃은 말이 없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에 맞추어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까무잡잡한 피부, 깊이 파인 얼굴의 굴곡은 세월의 바람에 닳은 흔적이리라. 그가 가만히 서서 노란 작은 꽃을 보는 그 곳은 꽤 가파른 경사길이다. 그 가파른 경사는 매일 오르내리는 나에게도 익숙하지 않다. 하물며 그 곳의 작은 꽃은 어떤 연유가 있기에 그를 멈춰 세웠을까. 그는 허름한 차림이었고 막노동판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검게 그을리고 굳어보이는 손가락, 역시나 짧은 손톱, 온통 뒤집어 쓴 먼지는 다른 것을 의심해볼 여지를 막아섰다. 한 눈에 꽃과 그를 동시에 집어 넣는 것은 정말 어색했다. 경사를 다 오르기만 해도 내 안경알에는 완연한 봄에 물이 오를 대로 오른 싱싱한 젊음이 가득 차 비칠 것이었다. 지나치려던 내 걸음을 멈춘 이 어색한 그림 속 그가 늘어진 앞 주머니에 걸려있던 펜을 집었다. 그리고선 그 꽃 앞에 놓인 정지석에 무언가를 적었다. 잠시 쭈그리고 앉았던 그는 이내 경사를 올랐고 그 자리엔 꽃과 몇 글자가 남았다. 나도 얼떨결에 남겨졌고, 이상한 봄의 어떤 날이었다.


나는 봄, 꽃이 피는 시기에 고향을 떠났다. 봄과 청춘이 함께하던 그 때의 나는 가난했으나 분명 젊었다. 딱히 배운 것은 없었으나 세상에서 꽃을 피우고, 인생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고향의 봄을 품고 도시로 떠났다. 배운 것이 없던 탓에 이런저런 일을 해야 했지만 힘들지 않았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꽃이 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저 새로운 삶을 받아들였다. 며칠 간 나갔던 막노동 판에서 말수 없고 묵묵히 일하는 나를 눈여겨 본 한 형님이 목수일을 가르쳐주시겠다고 하셨다. 처음 배우는 일이었지만 예전보다 급여도 좋았다. 목수 일을 배우는 것이 좋았다. 나무는 저마다의 향과 무늬가 있었고 각각 다루는 방법에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나도 분명 나만의 향과 무늬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여전히 꽃을 피울 봄이 오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목수 일을 시작하여 터를 잡은 곳 뒤에는 야트막한 산이 있었다. 어느 계절 할 것 없이 높지 않은 그 산 꼭대기엔 바람이 많았다. 그 산에 오르는 것이 좋았다. 내가 살던 방이 곰팡이가 쉽게 피는 반지하 방이라서 무작정 방을 벗어나는 것이 좋았다기 보다도 그저 산에 오르는 것이 좋았다. 시간과 걸음이 닦아놓은 투박한 길에는 바람이 다녔고 나도 그 길을 따라 꼭대기까지 오르곤 했다. 꼭대기에서 맞는 바람은 목욕으로는 떨어지지 않는 티끌을 털어내는 것 같았고, 난 그런 바람을 늘상 맞고 서 있는 산의 품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고향을 떠나 수 년째 살던 그 곳, 그리고 좋아하는 그 산 꼭대기에 어느 봄, 누군가가 왔다. 아마 한 동네 처녀였을 것이다. 두드러지지 않는 외모와 행색의 수더분한 처녀였다. 그녀는 산자락 바로 아래 마을 어귀가 보이는 곳에서 고개를 반쯤 숙이고 있었다. 특이한 점이라곤 그 뿐이었다. 사실 그 산 꼭대기 그 자리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었고 그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 없어 보이는 그녀는 내가 산에 오를 때마다 그곳에서 고개를 반쯤 숙이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이 앉기에 넉넉한 의자를 만들어 그녀가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 자리 한 걸음 옆에 두었다. 어느 순간부터 내 마음에 자리한 그녀에게 해줄 수 있었던 것은 그 뿐이라 생각했다. 그녀가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기를 바랐다. 그리고 기다리는 사람과 다시 만나 행복해진다면, 나 또한 그러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상하게도 절대 의자에 앉지 않았다. 나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 하는 듯하여 안타까웠다. 그렇게 그녀가 앉기를 기다리고 바라보았다. 그러던 이듬해 봄, 나는 그녀의 자리라 생각했던 그 의자에 먼저 앉았다. 그런 나를 눈치챘으면서도 역시나 말없이 한 걸음 옆에 서서 고개를 반쯤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용기를 냈고 물었다. 왜 앉지 않느냐고. 그녀는 대답했다. 자기가 앉아도 되는 의자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었다고 했다. 의자가 놓인 이후부터는 기억이 바람에 닳기를 기다렸다고 했다. 기다리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했다. 우리는 의자에 함께 앉았고 그 해의 목련이 지는 것을 함께 보았다.


몇 해가 지나고 아이가 태어났다. 아들이었다. 세상은 점점 팍팍해졌고 벌이도 시원치 않았다. 아내와 아들에게 세상의 바람을 맞게 하고 싶지 않았다. 산꼭대기의 의자 한 귀퉁이 바람을 맞는 쪽에 의자를 이어 붙였다. 가족과  함께할 수 있었다. 삶은 고단했으나 힘들지 않았다. 꽃이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꽃이 피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세월의 봄은 겨울을 인내한 내 인생에도 꽃을 피워주었다.


아내는 아이가 사춘기를 맞기 전 세상을 떠났다. 가난한 목수의 아내였다. 가진 것이라곤 가난과 남편과 아들, 의자와  바람뿐이었다. 아내의 옷가지며 이것 저것을 한데 모아 태워 바람에 보냈다. 그녀의 온기가 피워낸 아들은 키가 훌쩍 자라 의자에 길게 누워 의자를 가득 채울 수 있었지만 가슴 한 켠이 허전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무뚝뚝한 나는 아들과  대화하는 방법을 잘 몰랐다. 서먹하다 싶을 정도로 대화가 없었다. 친하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겠지만 그런 아버지일지언정 아들이 세상의 바람을 맞지 않도록 하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아내는 세상을 떠났지만 아들과 함께 산에 오르고 의자에 앉아 우리의 바람을 맞을 수 있었다.


옆동네 한 고등학교로 일을 왔다. 꽤 가파른 경사에 나무로 된 계단이 있고 군데군데 손볼 곳이 있다. 여차여차 생긴 일거리였고 날이 참 좋다.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볕이 어깨 죽지를 살살 달군다. 아들이 저보다 일찍 집을 나서는 나에게 쥐어주던 용돈으로 점심도 사먹었다. 점심 먹고 한 숨 돌리며 계단 맞은편 화단을 구경했다. 가꾼지 얼마 안 되었는지 봄임에도 불구하고 화단은 허전해 보였다. 화단을 따라 경사를  중간쯤 오르다 이내 멈추어 섰다. 도로와 화단을 가르는 정지석 바로 뒤에 작은 꽃이 한 송이 피어있었다. 아 꽃이다. 고개를 반쯤 숙인 수더분한 꽃이었다. 이 꽃을 피우기 위해 겨울을 견디었을 것이다. 얼어서도 안 되고, 움이 튼 싹은 바람에 허리가 꺾여서도 안 되었을 것이다. 왈칵 쏟아낼 뻔 했다. 내가 겪어야 했던 겨울이 생각났고  함께했던 아내가 아른거리고 아들이 떠오른다. 고향을 떠나며 품었던 꽃이 결국은 인생에 피었음을 새삼 실감한다. 쭈그리고 앉아 정지석의 먼지를 털었다. 마침 가슴팍 주머니엔 작업 때 쓰던 유성펜도 있다. 아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안녕이란 말로 짧은 인사를 시작해야지.


경사길 꼭대기 너머 새 봄과 새 청춘의 소리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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