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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치니 Feb 19. 2024

피아노

 내가 어렸을 때도 부모들의 교육열은 높았지만 사교육이 지금처럼 어마어마한 시장은 아니었다. 그래도 대부분의 아이들이 피아노나 태권도를 다녔다. 풍족하지 않은 집안 살림 덕분에 셋째인 나에게는 그 마저도 기회가 없었다. 우리 엄마는 여자 아이라면 으레 다니던 피아노 학원에 큰언니와 작은언니를 보냈다가 바이엘을 겨우 마칠 무렵인가 그것조차 끊었다. 집에 피아노를 들일 형편도 되지 않을 뿐더러 학원비 역시 부담이었던게 아닌가 싶다. 사이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보내주니까 당연히 안 가는거구나 했다. 음악 시간에 선생님의 요청으로 피아노 반주를 하아이들을 보면 부럽기도 했지만 피아노를 치는 것이 학창시절 나에게 불편함을 주지는 않았다. 


 그런데 다 자라고 나서 그게 이상한 컴플렉스가 되었다. 교대에 다닐 때 그제서야 내가 피아노를 배운 적 없다는 사실이 그렇게 서러울 수 없었다. 사실 피아노는 핑계였는지 모른다. 유년시절 나를 숱하게 위축시켰던 사건들이 그때는 무엇이라 명명해야할지 모르다 이제야 그 실체를 깨닫게 된 것인지도. 피아노가 도화선이 되어 마음에 불이 난 것 같았다. 하필 교대에서 그 컴플렉스가 터진 것은 피아노 수업 때문이었다. 왜 뒤늦게 선생님이 되겠다고해서 굳이 느끼지 않아도 될 열등감을 갖게 되었는지 스스로를 원망하기도 했다. 나에게 떠오르는 선생님은 전지만한 크기의 악보를 칠판 앞에 펼쳐놓고 오르간을 연주하던 모습이었다. 선생님의 연주는 당연한 것이었고 반주를 넣으며 심지어 노래도 부르고 아이들도 지도하셨다. 


 과외비로 받은 돈을 들고 낙원상가에 갔다. 제일 저렴한 디지털 피아노를 골랐고 내 마음에 촌스럽게 보였던 검붉은색 외관에는 금색으로 ACADEMY라고 적혀있었다. 피아노가 배송된 날 동네 피아노 학원을 등록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그 학원을 딱 이틀 갔다. 핑계를 대자면 내 창피함이 내 용기를 이겼다. 다 큰 어른이 어린이들과 함께 도레미를 딩동딩동 하는 게 창피했고 뭔지 모르게 기분 나쁜 원장의 깔보는 시선이 싫었다. 결국 혼자 끙끙거리며 악보를 읽었고 피아노 수업이 있던 그 학기의 학점을 위해 애국가를 양손으로 쳤다. 잘 친 것은 아니고 그냥 쳤다.


 피아노에 대한 내 마음은 점점 동굴로 들어간다. 당시 남자친구였던 내 남편은 초등학교 내내 피아노를 배웠고 체르니40으로 웬만한 곡은 악보만 보고도 연주가 가능하다. 연주할 때 가끔 멋져보이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사실은 나에게 상대적 박탈감으로 다가왔다. 시댁에는 30년이 된 영창피아노가 있다. 관리가 잘되어 지금 보아도 새 것 같고 소리도 좋다. 남편은 어려서 배웠던 자기 이름 세 글자가 적혀있는 악보를 펼치고 조지윈스턴피아노앨범이나 피아노명곡집을 연주한다.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은 왠지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우리 시부모님은 나에게 한번도 연주를 권하지 않으셨다. 동굴 속에 들어가 잔뜩 화가 난 내가 외친다. '더 못난 것도 없는데 왜 난 피아노를 배우지 못했지?'


 처음 내 돈으로 샀던, 아카데미에서 나온, 그 검붉은색 전자피아노를 결혼 할 때 버리고 오고 싶었다. 그런데 당시 신랑이었던 내 남편이 신혼집에 가져가자고 했다. 나름 추억의 물건으로 묘하게 설득 당해서 내 공간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지만 내 실력을 늘릴 일은 별로 없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바빴고 학교에서는 굳이 직접 연주하지 않아도 음악 수업이 가능했다. 간혹 피아노에 심취한 1~2학년 아이들이 '선생님은 피아노를 얼마나 잘 치는지, 엘리제를 위하여를 칠 수 있는지, 체르니 200도 있는지' 물어보긴 했으나 피아노에 대하여 그다지 떳떳하지 않은 마음으로 나름 잘 지내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에 영혼을 울리는 생생한 피아노 반주를 해 줄 수 없음에 아쉬움이 남는 정도다. 선생님의 라이브가 있다면 아이들은 얼마나 신이 날까.


 결혼 할 때 버리고 오고 싶었던 디지털 피아노는 첫째가 7살이 되었을 때 새 주인이 생겼다. 아이가 피아노 학원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소리가 나지 않던 건반이 있어 전체 건반을 다시 갈아끼웠다. 첫째가 체르니 100을 끝낼 무렵 내 피아노는 주인이 한 명 더 생겼다. 첫째와 둘째는 서로 자신이 치겠다고 다투기도 하고, 피아노 뚜껑을 안 닫고 갔느니 전원을 끄지 않았느니 서로 잔소리를 하며 피아노 주인 행세를 했다. 고맙게도 나와 다르게 아이들은 피아노를 사랑했다. 함께 젓가락 행진곡을 연주하기도 하고 어느날은 엄마 아빠를 방으로 초대하여 멋지게 연주회도 열어주었다. 


 아이들이 자라는 만큼 피아노도 늙었다. 피아노가 내 품에 온 다음 10년이 지나서야 딸들을 통해 제대로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이 피아노도 늙은 것이다. 너무 노후한 탓에 맑은 소리를 낼 수 없어 이사를 오며 정리했다. 아이들은 고치면 쓸 수 있다고 끝까지 반대했지만 이제는 제법 괜찮은 피아노를 사주고 싶었다. 큰 아이는 아빠만큼 피아노를 잘 친다. 곧 아빠보다 잘 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집에서 피아노 치는 순위를 따지면 남편과 큰 딸이 막상막하이고 둘째 딸이 그다음 그리고 한참 밑이 나다.


 새 피아노가 온 날 설레었다. 설치하러 오신 기사님이 높은 건반부터 한 음씩 두드려볼 때 너무 맑은 소리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제 나도 피아노를 배워볼까. 아직 레슨을 받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우리 딸이 날 도와줄 것이다. 큰 아이가 '냠냠 맛있는 꼬마손 동요곡집'을 들고 온다. 비록 '꼬마손'은 아니지만 쉬운 것부터 시작해보라고. 악보를 열어보니 곡 마다 날짜가 두 개씩 써있다. 하나는 첫째가 배울 때, 또 하나는 둘째가 배울 때 피아노선생님이 적어주셨던 날짜다. 그 옆에 또 하나의 날짜를 적어야하나? 


 언젠가 '기쿠지로의 여름'을 우리 딸처럼 멋지게 연주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새 피아노와 부디 친해지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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