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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치니 Apr 19. 2024

여행의 조건

 싱가포르에 다녀왔다. 자카르타에서 싱가포르 창이 공항까지 1시간 반 정도니까 두 시간 걸리는 국내선 발리보다도 가까운 위치에 있다. 비행기 티켓을 끊기까지 이게 이렇게나 고민할 일이냐며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결제 버튼을 누르고 나서도 내 마음은 마구 소용돌이쳤다. 이번 여행에 남편은 부재중이고 토끼같은 두 아이와 겁 많은 엄마만 갈 것이다. 그동안 이런 종류의 여행은 줄곧 남편이 준비해왔기에 설레여야 할 기다림의 시간이 나에겐 엄청난 용기였다. 잘 모르는 여정에 심지어 나 혼자 보호자가 되다니.


 사실 나는 해외여행에 인색하다. 다들 좋아하는 여행은 당연히 나도 좋다. 하지만 마다할 이유가 하나 있다면 바로 '돈'이다. 이자와 수익률에 일희일비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나에게 여행경비를 호탕하게 쓸 배포가 없다. 게다가 아이를 낳고 지난 10년간은 여행의 가성비가 그리 좋지 않았다. 아이 맞춤형 휴양지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인생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이 이런 여행에 적극적인 자세로 임할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번의 그 수동태 여행들은 좋은 경험이었다. 적어도 리조트 수영장에서 타월 빌리는 법은 알았으니까.  


 요즘은 네이버에 어느 국가의 지역명만 입력해도 최신 정보들이 넘쳐난다. 너무나도 친절하게 가는 여정, 숙소 추천, 필요한 준비물, 가볼 곳과 맛집, 심지어 쇼핑 리스트까지 상세하게 알려준다. 우리가 아는 관광 산업이라는 것이 사양화되는 까닭은 인공지능 도입 이전에 이미 수많은 SNS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제 다들 똘똘하게 각자의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나는 생각보다 계획적이지도 꼼꼼하지도 않은 사람이므로 정보와의 접촉을 자제한다. 감사하고 유용한 정보들이지만 교과서 열심히 공부하는 모범생처럼 되고 싶지 않다.  


 여행을 준비하다 보니 예전보다 수월한 점이 많다. 이제 환전도 딱히 필요없고(신용카드나 pay, 트레블월렛 등으로 결제하니까) 통신도 이심(eSIM)만 받아가면 된다. 방문하고 싶은 장소들은 해당 홈페이지를 찾지 않아도 쿨룩(Klook)이나 아고다(Agoda) 같은 사이트에서 미리 입장권을 구매하고 QR코드로 받는다. 심지어 입국 심사나 세관 신고도 과거에 비해 편리해졌다. 어느 블로그에서 영어를 못하는 자신이 해외여행을 잘 다니는 것을 보고 본인의 엄마가 너무 놀랐다는 말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말이 이해가 간다. 대면으로 대화를 하며 문제를 해결할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번역기도 있다.


 한때 '배낭여행'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쓰였다. 다들 한번쯤 해보고 싶은 버킷리스트로. 그리고 패키지여행과 상대적인 개념으로 '자유여행'이라는 표현도 많이 썼던 것 같다. 이제는 그런 단어들이 좀 촌스럽게 느껴진다. 해외여행이라는 말 조차도 별로 안쓰는 것 같다. 나라 이름도 안 붙이고 그냥 지역명만 붙인다. 가까워진 심리적 거리 만큼 '나트랑 여행', '뉴욕 여행', '후쿠오카 여행' 이라고들 말한다. 그만큼 다른 나라를 여행하는 게 사람들에게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나보다.(해외여행을 얼마나 자주 가는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그 와중에 나는 부자연스럽다. 관심도 많지 않았고 경험도 부족하고 이런 여행은 너무 오랜만이다. 엄마 마음을 모르는 아이들은 그저 옆 동네 놀러가는 것 같이 너무 걱정 말라는데 엄마가 걱정하는 게 뭔지 알고 있기는 한건지. 뭐 그래도 걱정하지 말라고 말할 만큼 컸으니 그래도 든든하다. 조그만 가방 하나에 생수병이랑 교통카드랑 휴대폰 넣어가지고 각자 걸어다닐 예정이니까. 무엇보다 싱가포르는 안전한 나라다. 대중교통도 잘 되어있다. 국민소득은 무려 6만불이 넘는다. 내가 믿을 만한 구석들이다.


 가기 전에 지녔던 긴장감이 무색하게 결과적으로 여행은 매우 즐거웠다. 정말 오랜만에 하루종일 신나게 돌아다니며(인도네시아에서는 도로 상황상 걸어다니는 게 어렵다.) 매일 2만보를 찍었고 가고 싶은 곳을 가고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먹고 싶은 것을 먹었다. 마음대로 지하철이든 버스를 탔고 걷고 싶으면 그냥 아무데나 걸었다. 예전에 남편과 둘이 갔던 여행들이 생각날 만큼 설레고 신이 났으며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해냈다는 뿌듯한 마음까지 들었다. 오는 내내 두 아이가 지겨워할 정도로 'I love 싱가포르!'를 외쳤다.

 

 지난 여행과 이번의 차이를 느끼기를 바라며 구별을 강요(?)했지만 덤덤한 아이들에게는 그 여행이 그 여행이다.(물론 모두 좋았다는 말이다.) 그들에게 이번 여행이 나만큼 특별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학창시절을 보낸 90년대는 모두가 해외여행을 가는 시대는 아니었다. 그런 일은 우리집에는 없었으며 나의 첫 해외여행은 대학교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웬만한' 요즘 아이들은 어릴 때 이미 해외여행에 익숙하다. 그래서 '개근거지'라는 신조어는 마음이 아프다. 남들이 다 가니까 우리 아이만 못 가면 부모 마음은 속상하다.


 1학년 가르칠 때 방학이 끝나고 등교한 아이들이 방학 지낸 이야기를 하는데 자연스럽게 여행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 반 하린이가 "난 비행기 한번도 못 타봤는데."라고 말하니 눈치 없는(1학년이니까 당연하다) 남자 아이가 "말도 안돼!"라며 손바닥으로 자기 이마를 친다. 그 순간 제일 당황한 것은 유일한 어른인 나였다. 혹시 그 말에 하린이가 상처받지 않을까하고. 하린아 선생님은 스무 살이 넘어서야 처음 비행기를 탔단다. 나중에 누가 더 많이 여행을 다닐지는 아무도 몰라. 우린 아직 여덟 살이잖아. 나중에 스스로 가는 여행은 진짜 멋진 여행일거야.

 

 사실 맞벌이 가정인 우리집도 이것저것 생각하면 해외여행은 녹록치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내 여행의 조건에 금전적인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제 아이들이 각자의 몫을 할 만큼 컸으며 견문을 넓히고 생각을 키워야 할 때가 되었으니 적어도 필요조건이 더 생겼다.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은 지금 해야 한다고 어른들께서 늘 말씀하시는 것 아닌가. 더욱이 여러 가지 덕분에 여행을 준비하는 것이 점점 더 쉬워지고 있으니까 이제 내가 가고 싶은 여행을 만들 수 있는 때가 온 것 같다. 조만간 여행 통장을 하나 마련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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