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는 동안 내 인간관계에 대하여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학교 다닐 때 같은 반에 친한 친구 몇 명은 있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늘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다. 분위기를 주도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리에서 빠지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인싸도 아싸도 아니게 평범한. 특별히 튀지도 존재감이 없지도 않은 보통의 사람이었다. 항상 어느 조직에 속해 있었기에 자의든 타의든 인간관계는 있었다. 그러므로 관계 맺기에 대해서 그다지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성향을 묻는다. "너는 I야 E야?" 그 질문은 다 까먹은 수학공식을 활용해야 하는 문제만큼이나 어려웠다. 제대로 된 MBTI 검사를 해 본 적이 없으니 스스로 답을 구해야 하는데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구분'한다는게 참 힘들었다. 분명 내 안에는 외향적인면도 내향적인면도 있는데. 그게 49 대 51일지라도 편가르기를 해야한다. 내가 I인지 E인지.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한다. 공부할 때도 그랬다. 옆에 누가 있는 게 좋았다. 약간의 부담감만 빼면 사람들 앞에서 말하고 주목 받는 것도 좋아한다. 한때 멋진 마케팅 프리젠터(presenter)가 되는 게 꿈이기도 했다. 그런데 낯을 가린다. 거절당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먼저 나서서 만남의 자리를 만들지도 않는다. 누구에게 먼저 연락도 잘 안한다. 종종 누군가를 만나고 돌아오면 피곤하다.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도 좋지만 혼자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도 좋다. 때로는 관계에서 에너지를 얻고 때로는 잃는다. 그렇다면 나는 E인가 I인가.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하자 친구가 조언한다. '사람을 만날 때 긴장도가 높으면 I인거고 그게 별로 없으면 E야.(이건 어디까지나 그녀의 믿음이다.)' 그렇다면 답은 너무나도 I이다. 왜냐하면 나는 누군가를 만날 때 항상 긴장한다. 친구를 만나도 긴장하고 잘 모르는 사람들과 있을 때도 긴장하고 심지어 대면이 아닌 만남조차도 긴장한다. 그래서 스스로를 정했다. 나는 꽤나 내향적인 사람이라고. 그동안 관계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었던 불편함이 '내향적 인간' 하나로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싫다면 굳이 안해도 돼.' 하고.
그런데 나를 둘러싸고 있던 조직이 없어지니 내 인간관계는 온전히 내 몫이 되었다. 동굴에서 나가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고독한 인간이 되었다. 그렇게 몇 달을 살아보니 관계가 그리워진다. 페트리 접시 위에 축축하게 젖은 솜처럼 핀셋으로 누가 나를 끄집어내준다면. 그 갈망으로 새로운 모임에 들었다. 짧은 인사글과 자기 소개로 모임에 가입되었다. 다른 사람 글을 읽고 댓글과 표정을 단다. 만남에도 참여한다. 함께 걷고 함께 차 마시고 밥을 먹는다. 좋은 사람들이다. 모두 사람을 대하는 태도만큼이나 마음도 순수한 분들 같다.
궁금하다. 다른 분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떤 마음일까. 나만 가슴이 허한 걸까. 다들 같은 마음인데 그 마음 한쪽에 치워두고 잠시라도 위안을 받는 걸까. 아니면 진짜 마음이 채워지는 걸까. 다시 축축한 페트리 접시로 돌아가고 싶은 감정을 억누르며 나도 웃고 떠들고 예의를 갖추어 말한다. 돌아와서 그날 함께한 시간에 대한 즐거움과 감사를 남긴다. 다른 후기에 하트나 엄지척을 붙인다. 사실 그 분들이 좋아서 나는 계속 모임에 나갈 예정이다. 그런데 나는 어디까지 깊어져야하지? 어디쯤에서 '그만'을 외쳐야할까.
언제부터 관계에 이렇게 지쳤을까? 내향적 인간이라고 나를 단정지은 다음부터였을까.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내가 행해야하는 모든 과정들이 귀찮다. 마음보다는 예의가 먼저 나가는 그 상황들을 생략하고 싶다. 아이들한테 항상 그렇게 얘기했었다. '혼자 놀아도 되고 둘이 놀아도 되고 여럿이 함께 놀아도 돼. 부담 갖지마.' 그런데 정작 내가 부담을 느낀다. 혼자 놀고 싶지 않다. 여럿이 함께 놀기 위해 부담을 갖고 애쓰고 있다.
너무 게을러서 그런 부지런함을 요하는 일들은 마냥 미루고 싶은 게 아닐까. 남들은 하루에 10가지 일을 할 때 나는 한 3가지 정도 밖에 못하면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만하게도 외로움은 싫은데 누군가를 위해 쏟아야 하는 시간이 아까운 딜레마에 빠졌다. 지금의 나는 내향적 인간이 아니라 그냥 따뜻함이 부족한 인간 같다. 동굴로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나를 다시 축축하게 적시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시간이 필요한 일이라고 다독인다. I든 E든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서로를 밀어내는 놀라운 존재니까.
사진 출처 : Pixabay. Enriq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