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대학 졸업하고 2년 정도 회사를 다녔는데 그때 나는 불만족 덩어리였다. 퇴근길에 눈물을 훔치기 일쑤였고 직장인이 가장 기분 좋아야 할 금요일부터 이미 월요병에 시달렸다. 분명 가고 싶은 회사였는데 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인사팀에서 중간에 사업부와 직무를 바꾸어주었는데 거기서도 내 길을 못 찾고 결국 퇴사했다. 그런데 후임으로 올 언니(회사에서 알고 지내던 사이)에게 업무 인수인계를 하며, 고백하자면 못된 생각을 했다. '언니도 그 자리에서 버티지 못하기를. 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자리가 문제였음을 만천하에 드러내길.'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몇 년 동안은 소식을 들었는데 나와 다르게 잘해냈다.
다른 길을 선택했고 다시 직업을 얻었으니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기는 하나 그 경험은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이건 아니다 싶어 또 박차고 나온다면 그냥 아무 일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아무 것도 해내지도 못하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 그런 선례를 한번 더 만들지 않으려고 스스로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다행히 다음 직업의 만족도는 높았고 시간이 갈수록 트라우마 역시 옅어졌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그 일이 떠오른다. 지금 그와 비슷한 마음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다들 괜찮다는데 나만 불편한 것 같은 상황. 다들 숙명이려니 받아들이고 사는데 나 혼자 인상쓰며 '저 불만있어요.'하고 손 드는 상황. 지금 마음이 그렇다.
그래서 그 모든 원인을 '나'에게 돌린다.
10살 둘째와 오붓하게 저녁을 먹는데 딸이 물어본다. "엄마는 엄마가 예쁘다고 생각해?"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답한다. "아니."(괜찮다. 대부분의 여성은 자신의 외모가 별로라고 생각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나만 그런 건 아닐거야.) "나는 엄마가 예쁜 것 같은데."라고 말하며 딸이 다시 묻는다. "그럼 나는 예쁘다고 생각해?" "그럼, 예쁘지." "언니는?" "언니도 예쁘지." "그럼 아빠는?" "아빠도 예쁘지." 순간 철학적인 질문으로 변한다. "그런데 엄마는 왜 엄마만 안 예쁘다고 생각해?" 머릿속에 불이 꺼졌다. 아무래도 엄마에게 가르침을 주려는 질문이었나보다. 정말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사랑 받을 수 없는데.
우연히 예전 방송에서 신채경 박사가 말하는 것을 보았다. (천체의 무게중심에 빗대어 나의 중심잡기와 발레리나의 예에 관한 내용들이었다.) 내 무게중심은 분명히 나의 내면에 있다. 심지어 남부럽지 않게 꽤나 묵직한 무게중심이다. 그런데 발레리나처럼 좁은 발로 세상에 서서 버티려고만 한다. 여러모로 스스로에게 각박하다. 발끝으로 버티는 나는 쉽게 휘청거린다. 그게 얼마나 힘들었을까. 두 발로 편하게 서도 될텐데. 때로는 그것조차 힘들면 아빠다리하고 주저앉아도 되는데. 부적응? 나만 그럴 수도 있다. 불만족? 여러 번 그럴 수도 있다. 나만 싫을 수도 있고 나만 불편할 수도 있다. 인상이라도 팍 쓰고 싶으면 써도 된다. 문제는 나도 너도 아니다. 야박한 기준이 문제다.
어떤 점을 변화시키려는 게 아니라 그저 이런 내 모습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려고 한다. 스스로를 충만하게 채우려는 것이 아니라 별로인 내 모습까지 인정하려는 것이다. 그게 좀더 건강한 나로 살아가는 방법이다. 내 습관 못 버리고 또 자신을 흔들어댈 때도 있겠지만 흔들린다고 탓할 필요는 없다.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횟수가 잦아지고 강도가 약해질테니까. 그러니까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