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모임 2
글을 써야 하는데.
글이 쉽게 써지질 않는다. 특유의 풍자와 유머가 넘치는 중국 작가 위화(대표작 '허삼관 매혈기', '인생'이 있다.) 조차 글쓰기의 고통스러운 집중과 인내를 '감옥'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던가. 혼자만의 감옥에서 글쓰기의 힘겨움을 느끼던 중, 감사하게도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 주제로 '두 번째 사람'을 받았다.
열심히 머리를 굴려본다. 나에게 두 번째 사람이 누가 있을까. 사랑하는 남편, 나의 인생 동반자가 몇 번 되지 않은 연애 경험 속 두 번째 사람이었던가. 소중한 우리 둘째 딸이 나에게 온 두 번째 사람일까. 그도 아닐 것이다. 아이들에게 순서 같은 것을 매기고 싶지 않다. 첫 번째, 두 번째가 아니라 너는 그저 해님이고 너는 그저 달님일 뿐이다. 부모 다음으로 내가 만난 어른이었던 학창 시절의 은사님 정도가 두 번째 사람이 될 수 있으려나. 또는. 다시 시작한 대학 생활에서 만난 인연을 두 번째 사람이라고 불러야 할까. 아니면. 앞으로 두 번째 사람이 올 수 있다는 가정이라도 해야 하는 건지 불순한 생각도 스친다. 그동안 나를 찾아왔던 만남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하지만 두 번째 사람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두 번째'라고 하기에는 모두가 각자 다른 의미에서. 나는 그들의 우주를 만났다. 그럼 언제 찾아왔던 사람이. 도대체 누가. 두 번째 사람이었을까.
순간 문득 내가 궁금해진다. 외부 세계가 아닌 내면에. 그러니까 내 안에 두 번째 사람이 있지는 않을까. 그분인지 그 놈인지 모를 누군가를 탐구하고 싶어진다.
우리는 흔히 이중성에 대하여 말한다. 이성과 본성. 선과 악. 하지만 이러한 분리는 과학적으로 옳지 않다고 믿는다. 우리는 다른 누구보다도 무의식 속에서 본성을 작동시키는 존재이며 또한 이성적인 것은 모두 좋은 것이라 말할 수도 없다.(나쁜 마음과 행동이 이성에서 오는지 본성에서 오는지 쉽게 구분할 수 있을까.) 선과 악 역시 태초부터 인간이 지녀 온 근원적인 문제이지만 '첫 번째 나'를 선으로 '두 번째 나'를 악으로 규정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이러한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보니,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가 생각났고 지킬 박사의 두 번째 사람이었던 하이드 씨가 궁금해서 책을 읽었다.
어려서 이 고전 '명작' 소설을 알게 된 것은 전적으로 서태지와 아이들 덕분이다. 당시 어린 마음에 노랫말이 얼마나 충격적이고 무섭던지 지금까지도 하나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다. (우리 세대라면 공감할 만하지 않을까. 내가 아이였을 때 젊은 서태지는 이 책을 읽고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하지만 이 나이에야 비로소 길지도 않은 글을 온전히 책으로 읽어본다. 두 번째 사람을 찾는 단서를 얻을지도 모른다. 소름 끼치고 기괴하다는 하이드 씨의 모습과는 다르게 문장들이 얼마나 기품 있고 아름다우며,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고자 하는 작가의 생각은 또 얼마나 품위 있고 모범적인지.
"근거 없이 추측해 보자면, 인류는 궁극적으로 다양하고 이질적이고 독립적인 개체의 집합체일 뿐이다. 내 경우에는 성격상 어김없이 한 방향으로, 오직 한 방향으로만 나아갔다. 나는 도덕적인 측면에서, 즉 본래의 인간성 안에서 철저하고도 근본적인 이중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내 의식의 영역에서 다투는 두 가지 본성 중 어느 하나를 나라고 한들 틀리지 않는데, 이는 내가 근본적으로 그 둘 다이기 때문이다."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 (현대지성)』중에서
우리 안에 있는 독립적인 요소들이 얽혀 내가 INTP형의 인간이 되었다면 나의 두 번째 사람에게는 철저히 ESFJ적인 성향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성적이고 수줍은 내면에는 주목받고 싶은 자아가 꿈틀 댈 것이다.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경기라도 일으키는 마음속에도 반항아가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즉흥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이면에 조용하고 신비로운 모습이 있을지도. 작가의 말처럼 우린 대체로 한 방향으로 흘러가지만 그것만이 나 자신이라고 규정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내 안의 두 번째 사람을 탐구하는 일은 의미가 있다.
지킬 박사는 하이드를 본인으로부터 분리해 내려다 비극을 맞이한다. 그는 둘 사이의 갈등을 넘어 하나의 모습으로 살고자 했으나 어떤 선택도 그에게는 불행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우리는 여러 내면의 자아와 함께 살아야 하는 숙명인지도 모른다. 즐겁지 않은가. 새로운 나를 발견할 때. 불쑥불쑥 찾아오는 두 번째 사람 또는 그 이상의 사람을 만날 때. 그동안 살아보지 못한 새로움으로 기꺼이 맞이할 수 있으니. 너무 투명해서 모든 것이 첫 번째 자아에만 오롯이 담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숨겨진 나의 두 번째 사람을 기다리며 때로는 우리 안의 변주를 환대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