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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끼 Jul 10. 2020

세상에서 가장 따듯한 거절

동네 친구 만들기 프로젝트 외전

혼자 살지도 모를 삶을 위해 동네 친구를 만들고 싶지만, 그래도 누군가와 함께하는 삶을 꿈꾸고 있기에 이런저런 시도들 - 소개팅이라던지 동호회라던지 - 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다가 대학원 조모임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겼다. 우리 조모임 조장을 한 사람인데, 어려운 일을 나서서 하는 태도라던지, 조목조목 모임을 이끄는 모습이 괜찮아 보였다.


사실, 학기 중에는 별 생각이 없다가 학기가 끝나고 생각이 많이 났다. 조모임 때문에 이런저런 일로 카톡을 하다가 알게 된 그는, 나와 같은 대학원은 아니라고 했고 다음 학기에는 전공 수업만 들을 계획이라고 했다. 실망스러운 마음이 스쳐 지나갔다. 같은 수업에서 또 만나서 자연스럽게 커피를 한잔 같이 한다던가, 밥을 같이 먹으면서 친해질 기회는 없겠구나. 아쉬웠다. 아쉬운 마음에 카톡을 계속 이어가지 못하고 손을 놓고 말았다.      

이렇게나 예쁜 가을을 그냥 보낼 수 없다는 그런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동생이, 친구가 똑같이 말했다.      


"밥 한번 먹자고 해봐. 같은 회사도 아니고, 이제 볼 일도 없다며, 뭐 어때. 아님 말고."


남에게 조언하기는 이렇게 쉽고 쿨하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렇게 해 본 일이 없었다.


하루, 이틀 고민이 계속됐다. 그러다 한 생각은,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하고서 후회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너무 거창한 생각이지만 죽을 때 내가 이 순간을 후회할까, 하지 않을까를 생각하면 답은 단순했다. 후회할 것 같았다.   


D-day는 화요일 저녁, 카톡은 전송됐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좀 당황스러우실 것 같은데, @@씨가 좋으신 분 같아서요~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언제 시간 되실 때 식사 같이 할 수 있을까 해서 연락드렸어요!!'


아아, 답장이 오기까지 십분 동안 가슴이 뛰다가 부끄러웠다가 하는 오만가지 감정이 지나갔다.      


'엇.. 먼저 저를 좋게 봐주신 점 너무 감사합니다. 저도 잠깐이었지만 $$와 카톡 하면서 정말 좋은 분이라 생각이 드는데, 지금은 만나는 분이 있어서 일과 중에 따로 뵙기는 그 친구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학기 시작하고 여유되실 때 학교에서 가볍게 식사라도 같이 하시면 어떨까요?'  


세상에 이렇게 따뜻하고 젠틀한 거절에다, 여자 친구가 있음을 알리면서 그 여자 친구에게도 미안하지 않게 이야기하다니, 역시나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카톡을 보낼까 말까 고민하면서 여자 친구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고 싶어서 조모임의 다른 분께 살짝 물어봤지만 잘 모르겠다고 했다. 혹시 카톡을 해서 저녁 약속을 잡더라도 만났을 때 여자 친구 유무를 확인을 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미리 여자 친구가 있음을 밝히고 여자 친구에게 미안한 일을 하지 않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멋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덧붙여 그 여자 친구도 멋진 사람일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좋은 사람은 다 여자 친구가 있구나, 하는 아쉬움과 내 사람 보는 눈이 틀리지 않았구나, 하는 마음이 동시에 지나갔다.      


그의 답장에 '좋게 말해주셔서 감사해요. 학교에서 뵐 수 있음 뵈어요. 당황스러우셨던 아닌지 모르겠어요.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하고 마무리했다.


대학생 때의 나는 왜 그처럼 거절하지 못했을까. 두어 번 고백을 받았을 때의 내 표정을 내가 보건 아니지만 상상이 된다. 세상 난감하고 곤란한 표정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왜 나를 좋아해?' 하고 생각하면서.      


대학생 시절의 나는 많이 미숙했었다. 세상 고뇌를 짊어지고, 자기 안으로 침잠하는 스타일이었다. 내가 좋다는 상대의 마음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안타깝고 아쉽지만, 누구에게나 그런 시절은 있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늦은 사춘기가 왔었고 내 안의 벽이 너무 높아서 누구를 쉽게 들일 수 없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그 벽이 낮지 않다는 건 함정!)


그 때,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사람에게 저렇게 따듯하고 정중한 마음을 보여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마음을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그렇게 무안하게 행동한 건지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나중에 혹시라도 누군가 내게 다정한 마음을 고백해 온다면, 이번 경험을 통해 배운 것처럼 나도 따듯하고 정중하게 그 마음이 고맙다고 답해주고 싶다. 그 마음을 받아주든 받아주지 않든 성숙하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어른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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