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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eet little kitty Sep 08. 2022

엄마와 민어 찌개

누군가의 인생을 구원할 순 없지만.

4년 전 봄, 엄마의 심장내과 진료가 있던 날이었다. 나는 마침 휴직하게 되어 평일 낮에 시간을 낼 수 있었다. 해서 오랜만에 엄마의 진료에 동행하기로 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의 진료에 동행했던 것은 늘 동생이었다. 차로 1시간 정도 거리를 운전하고, 진료를 기다리고, 약국에 가서 약을 받아오고, 지친 몸으로 한 끼 식사를 함께 사 먹고 오는 여정이었다. 진료실에서는 기껏해야 5분 남짓한 시간이지만, 환자의 입장에서는 하루를 다 쓰는 길고 고단한 과정이다.


나의 모교 병원이고, 선배 교수님이기에 설명을 직접 듣고 궁금한 것도 여쭤 봤으면 좋았을 것을. 나는 엄마의 진료 스케줄에 맞추지 못했고, 병원에 얼굴 한 번 내비치지 못하는 소극적 보호자였다.


"오늘은 어떻게 왔네? 출근 안 했어?"

"네, 잠시 휴직하려고요."

"응. 그렇구나. 지금 어머니 약이 너무 세. 지금보다 낮추고 싶은데, 맥박 수가 빨라서 힘드시다고 하니 강하게 쓰고 있지만 원칙은 아니야. 잘 지켜봐야 돼."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진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동생이 건너편 약국에 가서 처방전을 내고 약을 받아왔다. 엄마는 민어 찌개가 먹고 싶다고 했다. 마침 차로 15분 정도 가면 민어 찌개를 파는 곳이 있었다. 양식을 좋아하는 동생이 말했다.

"나는 민어 찌개 싫은데."

"........"


엄마와 동생 사이에 있으면 미묘한 신경전 때문에 힘들다. 사사건건 뭐가 안 맞고, 날이 서 있다. 이제껏 내가 보아온 사람들 중에 사이가 좋지 않은데 가깝게 지내는 사람을 꼽자면 바로 엄마와 동생이었다.

'환자가 병원에 다녀가는 길이니, 환자가 먹고 싶은 걸 먹는데 맞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중간 타협점의 한식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 아이 때문에 받기 시작한 상담실에서 그날의 이야기를 했다.

"아니, 하루 엄마가 먹고 싶은 거 먹으면 되지, 굳이 그렇게 끝까지 싫다고 해야 할지. 먹는 것 가지고 참, 답답했어요."

"음. 그런데 그날 병원에 동행해 보니 어떠셨어요? 힘들지 않으셨어요?

 그동안 동생이 누나 대신, 아버지 대신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다녀왔으니, 그날만큼은

'내가 오늘 와 보니 병원 진료 모시고 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네. 그동안 힘들었지? 오늘은 너 먹고 싶은 메뉴로 먹자.'라고 한 번이라도 말씀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동생도 마음이 풀어지고 다음엔 어머니 드시고 싶은 걸 같이 먹으러 갈 거예요."


그날은 동생보채는 아이 같았는데,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나와 엄마가 너무 이기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에게는 차마 말하지 못하고, 엄마에게 전화로 내용을 이야기했다.


"내가 오늘 상담 가서 얘기를 들었는데, 그게... 그렇대."

"응. 그래? 그렇구나."

엄마는 별 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로부터 1주지난 뒤, 엄마를 모시고 주말에 식사를 갔다. 언덕 위에 있는 피자집이었다.

평소 좋은 곳에 모시고 가도 엄마는 그다지 즐거워하지 않았다. 몸이 아픈 엄마에게 외출 자체가 힘들기도 하고, 소소한 순간을 즐기지 못할 만큼 몸과 마음에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도 별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동생이 운전해서 엄마를 모셔 왔고, 피자는 동생 좋아할 메뉴였지만 엄마와 함께였기에 나는 또 둘 사이가 걱정되었다.


그런데 그날은 엄마도, 동생도 아주 기분이 좋았다.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 나와 민어 찌개 이야기를 통화로 한 것? 그건 내가 처음 낸 의견도 아니었고 동생에게 직접 하지도 못한 말인데, 더군다나 엄마가 그 이야기를 동생에게 했을 리도 없는데.


누구도 무엇도 딱히 달라졌다고 집어낼 순 없었지만 나는 묘하게 편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를 느낀 것인지, 좀처럼 말이 없던 큰 아이가 할머니에게 이렇게 질문을 했다.

"할머니, 엄마 학교 다닐 때 성적 어땠어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아이는 당시 내가 일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고 많이 하지 않았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나에 대한 질문을 한다는 것부터가 신기한 일이었다.

"잘했지. 엄청 잘했지. 할머니가 엄마 중학교 때 상 받은 거 집에 보관하고 있는데, 못 봤니? 생각난 김에 챙겨줄 테니까 집에 가져가서 봐."

"........."

갑자기 정수리에서 머리 뒤쪽으로 눈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눈물은 눈에서 얼굴을 타고 흘러야 하는데, 나는 대놓고 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 우리 집은 최대의 위기였다. 아빠는 결국 퇴직을 하셨다. 건강이 너무 좋지 않았고, 반복되는 폐질환이 정확히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내지 못한 상태였다. 병원에서는 개흉술을 권유했다. 우리는 형편이 넉넉지 않아 수술비가 걱정이 되었다. 엄마는 아빠를 집에서 먼 국립 병원으로 옮겼다.


엄마와 아빠의 자존감은 바닥으로 내려앉았고, 우리는 우울한 상태로 살아갔다. 나는 중학교에 입학하고 첫 해를 혼돈 속에 보냈다. 나에게 공부는 너무 어려웠고, 새로 만난 친구들은 낯설고 두려웠다. 


당시 우리 학교에는 졸업 때 특별한 상이 있었다. 남학생 2명과 여학생 2명에게 중3 내신 성적순으로 상을 주는 것이었다. 700명이 넘는 전교생 가운데 대표로 받는 상이기에 의미가 컸다. 반면 중3은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기에도 벅차 내신 성적에 힘을 쏟지 못하는 시기였다.


자존감이 바닥에 내려앉은 부모님을 위해, 특히 엄마를 위해 멋진 순간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나 역시 고등학교 입시를 위해 전력 질주 중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신 성적에 조금 더 힘을 쏟았다. 어차피 남학생도, 여학생도 1등은 정해져 있었다. 2등을 놓고 오히려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3학년 2학기가 되자 중간고사에서 여학생 1등을 제치고 내가 1등을 했다. 1학년 때 성적을 두고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신 나는 공부 외의 모든 것을 포기했다. 애매하게 썸을 타던 남자 친구도, 하교 후에 하고 싶었던 소소한 일들도, 친구와 놀러 다니는 것도 어느 순간 나의 할 일 목록에서 제외되었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졸업식 때 상을 받을 여학생 2등이 나라는 소식을 들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나보다 잘하는 아이들이 그토록 많았는데. 집으로 달려가 엄마에게 소식을 전했다. 엄마는 기뻐했다.



늘 숨기고 싶었던 나의 흔적, 이제는 놓아줍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졸업식 날이 되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고모까지 모두 출동하여 나를 축하해 주었다. 그런데 나는 그날 이후로, 그 상을 받은 것을 부끄러워하게 되었다. 유는 몰랐다. 잊고 싶고. 숨기고 싶었다. 결혼할 때도 결국 그 상패를 챙겨 오지 않았다.


30대 후반, 상담실에서 천천히 내 과거를 풀어가는 동안 내가 그 상에 대해 잊고 싶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업식 때의 기쁨은 잠시일 뿐, 나는 엄마를 본적으로  행복하게 하지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실패한 상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애초부터 나를 위한 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이다.


 고등학교도 엄마가 원했던 곳으로 진학해서 열심히 공부했고, 대학도 엄마가 원했던 곳으로 진학했지만 모든 것은 그때뿐이었다. 우리 가족은 행복하지 않았고 엄마의 마음은 늘 여유 없이 걱정근심으로 차 있었다.


그런데 지금 엄마는 나에게 직접 얘기하고 있진 않지만, "그때 네가 정말 자랑스러웠고 엄마는 기뻤다. 우리 딸 고마워."

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말이 듣고 싶었나 보다.

마치, 오랫동안 짝사랑해왔던 상대가 어느 날 나타나서 "사실 그때 나도 널 좋아했어."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앞에서 울 수 없어서 뒤로 흘렸던 그날의 눈물은 나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내가 엄마가 되어보니, 아이가 졸업식 때 상을 받는다는 것은 뛸 듯이 기쁜 일이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안다면 눈물이 날 정도로 기특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엄마가 직접 말씀하지 않았어도 분명 기쁘고 행복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오래된 얘기가 왜 하필 그 시점에 나왔을까? '손녀딸이 물어봐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그날 엄마는 식사 때만 기분이 좋았던 게 아니었다. 루프탑에 올라가서 내 딸들과 기꺼이 사진을 찍고, 족욕을 하셨다. 그리고는 혼자 앉을 수 있는 벤치에 앉아서 독사진을 찍어 달라고 하셨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엄마는 평소 사진 찍는 것을 싫어하셨다.


그날은 4월이었고, 엄마는 그 해 12월에 돌아가셨다. 그 사이에도 엄마의 수술, 나와의 소소한 말다툼 등 많은 일이 있었고, 나는 엄마와 진정으로 화해하지 못했다. 결국 나에겐 그 4월의 어느 날이, 평생에 걸쳐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날이었다. 내가 원했던 엄마의 편안하고 행복한 표정을 그날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동생 역시 그 어떤 메뉴를 먹을 때보다 편안하고 즐거워 보였다.


그 시작은 민어 찌개였다. 상대방에 대한 원망을 거둬내고 한 번만 그 입장을 이해해 보는 것. 먼저 동생의 마음을 이해하고 채워주려 하는 법을 나는 몰랐고, 상담 선생님의 힌트를 빌려서야 처음으로 깨닫게 된 것이었다. 엄마도 동생에게 한 번쯤은 그렇게 이해해 주고 화해를 시도했어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던 게 아닐까. 그래서 나의 말에 반응은 없었지만 메마른 땅에 내린 비처럼 갈라진 마음이 잠시나마 붙어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뒤, 나는 동생과 많이 가까워졌다. 엄마의 눈으로 보지 않고 다시 바라본 내 동생은 평범하고 착하고 꼼꼼한 아이였다. 나를 많이 도와주고, 말없이 궂은일을 해 준다. 친정이 없는 나에게 동생은 유일한 버팀목이자 하소연할 대나무 숲이다. 우리는 함께 한 끼를 먹으면서 주기적으로 만난다.


까다롭고 예민했던 큰 딸아이를 키우며 많이 힘들었다. 휴직하고 육아에 전념한 지 2년 정도 지나고 나니 아이는 눈에 띄게 좋아졌고, 타인을 배려하고 타협할 줄도 알게 되었다. 동생의 집에 두 아이를 맡겼던 어느 날, 아이들을 데리러 간 나에게 동생은 이렇게 말했다.

"oo가 너무 달라졌더라. 동생을 설득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 사용하면서 이렇게도 달래보고 여러 가지 선택권을 제시하는데......."

동생이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그다지 울만한 상황 아니었는데, 그냥 눈물이 다고 했다.

"애가 노력하는 걸 보니까 내가 눈물이 다 나."


갑자기 마음이 얼얼해졌다. 까다로운 큰 아이를 키우는 동안 친정 엄마는 나만큼 울었다. 나는 그 눈물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동생은 나에 비해 까다로운 아이였고, 늦게 얻은 귀한 아들이었기에 기대는 훨씬 컸다. 예민하다는 면에서 동생은 나의 큰 아이와 비슷했고, 엄마는 손녀딸을 보면서 아들을 키웠던 순간이 생각난 것 같았다.


"이제 그만 일 그만두고 집으로 와. 네 남편 저러다 죽는다."

일찍 출근하는 나 대신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남편을 CCTV로 보면서 엄마는 아침마다 울었다. 본인의 몸도 성치 않은데 과거의 경험이 떠오르니 차마 와서 대신 봐주기도 두려웠던 엄마는, 그렇게 멀리서 혼자 괴로워했다.


동생도 내가 큰 아이를 키우는 과정을 보면서 엄마와의 관계를 떠올렸을 것이다. 내가 아이를 이해해 주려고 이런저런 노력을 하며 받아줄 때 동생은 부정적이기도 했다.


"누나가 왜 그렇게 걔를 이해해주고 사랑으로 감싸주는지 이해가 안 됐어.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까 그게 맞는 거였네. 엄마한테 받은 대로  동생한테 하려고 하는 것 같아."


내가 엄마로부터 듣고 싶었던 말, 보고 싶었던 표정이 있는 것처럼 동생도 엄마로부터 받고 싶었던 게 있었다. 내가 큰 아이를 키우는 과정을 보면서 어린 시절을 다시 겪는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엄마가 돌아가신 후,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과거를 극복해 갔다.


자식은 부모의 인생을 구원할 수 없다. 하지만 부모의 한 순간을 기쁘게 할 수는 있다. 나의 중학교 졸업식은 그런 면에서 실패가 아닐 것이다.


나는 민어 찌개의 맛을 모른다. 하지만 메뉴가 무엇이든 간에 가깝고 소중하지만 쌓인 것이 많아 풀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을 놓고 한 끼 함께 하기를 권해 본다. 누군가의 인생을 구원하겠다는 거창한 목표 대신 그저 한 순간을 함께 해도 우리는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커버이미지 출처

 https://m.blog.naver.com/PostList.naver?blogId=forbin4861




글이 너무 길어 죄송합니다. 다소 산만하지만 오랜 시간 고민하고 그 어느 기억도 버릴 수 없어 아프게 썼습니다. 타인의 인생을 행복으로 이끌고자 너무 애쓰는 분이 있다면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라테 플렉스가 아니라 어리고 철없었던 시절의 고백임을 밝혀둡니다.

그리고 저 코로나 걸렸어요. 오늘부터 많이 아플 것 같아요. 이웃님들의 글을 조금 늦게 읽어도 양해 바랄게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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