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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eet little kitty Mar 23. 2024

죽음을 앞둔 어머니와 아들의 대화

vanderbilt 가문 이야기

저는 이번 뉴욕여행에서 맨해튼 42번가에 있는 summit 전망대를 다녀왔습니다. 맨해튼 도심에는 관광지답게 전망대가 여러 개 있는데, summit은 그중에서도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최신 전망대입니다.


Summit 전망대는 One Vanderbilt라는 건물에 있습니다. 제가 2018년도에 뉴욕에 갔을 때에는 이 건물이 없었는데 찾아보니 2020년에 오픈했네요. One Vanderbilt 건물은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맨해튼 42번가의 One Vanderbilt 건물(좌)과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의 중앙 광장(우)


그랜드 센트럴 역은 1896년 설립한 터미널로, 정확히 말하자면 역이 아니라 터미널입니다. (역은 지하철 역을 가리킴) 현재는 뉴욕 주 북부와 코네티컷으로 가는 철도가 연결되어 있고, 2023년에는 그랜드 센트럴 메디슨이라는 이름으로 뉴욕주 내를 잇는 롱아일랜드 철도(Long Island RailRoad, LIRR)를 연결하여 신규확장 했습니다. 확장된 부분까지 합치면 52개 승강장과 75개 선로를 가진 세계 최대 규모의 터미널입니다. 저는 주로 47-50번 트랙에서 LIRR을 탔는데 승강장으로 내려가는 길이 매우 깊고 트랙이 많아 열심히 뛰어다녔습니다.  


Summit 전망대는 1층에서 티켓을 사서 입장하면, 짐검사를 한 뒤 손목에 팔찌를 채워줍니다. 팔찌에 있는 QR코드로 1층 모니터에서 얼굴을 스캔합니다. 91-93층 전망대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번개가 치는 듯한 소리와 조명이 나옵니다. 91층에서는 1층에서 스캔한 얼굴을 구름 영상 위에 합성하여 보여줍니다. 공중에 떠 있는 수많은 풍선을 가지고 노는 방도 있고, 쿠사마 야요이의 설치미술 작품도 있습니다. 단순히 도심의 뷰만 보는 곳이 아니라, 다양한 이색 체험을 하는 곳. 이런 모든 면이 최신 전망대의 특징입니다.



summit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맨해튼 시내(좌)와 풍선으로 만든 방(우)


              

전망대도 멋져서 좋았지만, Vanderbilt라는 건물 이름이 인상적이어서 집에 돌아온 후 검색해 보니 그랜드센트럴 역을 처음 만든 철도왕 코넬리우스 밴더빌트(Cornelius vanderbilt)의 이름이었습니다.


코넬리우스 밴더빌트는 네덜란드 이민자의 후손으로, 뉴욕주의 선박 운송업을 시작으로 사업을 확장하였습니다. 특히 19세기 중반 미국의 철도 산업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고, 동시에 엄청난 부를 축적했습니다. 미국 동부와 중부를 잇는 중요한 철도망을 건설하는 데 큰 역할을 했기에 '철도 왕'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코넬리우스 밴더빌트는 미국 경제사와 산업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 중 하나로 기억됩니다.


코넬리우스의 후손 중 또 하나의 유명인이 있습니다. 글로리아 밴더빌트(Gloria Vanderbilt)입니다. 그녀는 코넬리우스 밴더빌트의 5대 손으로, 1924년에 뉴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여성 패션 디자이너, 아티스트, 작가로 활동했으며, 청바지 브랜드인 "Gloria Vanderbilt Jeans"의 창립자로 유명합니다. 또한 예술과 문화 활동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부, 명성, 예술적 재능 등을 통해 미국 상류 사회에서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그러나 글로리아는 유년기에 아버지를 잃었고, 나이 어린 어머니는 글로리아의 양육비만 받고 외할머니와 보모에게 아이를 맡긴 채 사교계를 드나들었습니다. 글로리아는 심한 애정결핍과 혼란을 느고, 결국 양육권 소송에 휘말려 고모인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에게 맡겨집니다. 그녀는 뉴욕의 휘트니 미술관의 설립자입니다.


양육권 소송에서 고모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친어머니인 글로리아 모건이 동성애자라는 의혹 때문이었는데, 글로리아 밴더빌트는 이에 대해 증언을 요구받기까지 합니다. 과도한 언론 노출과 '부유하지만 불쌍한 소녀'라는 세간의 시선은 글로리아에게 큰 상처를 남깁니다. 성인이 된 글로리아는 평생 애정을 갈구하며 총 4번의 결혼과 이혼을 겪고, 유명한 남성들과 스캔들을 남니다.


글로리아에게는 앤더슨 쿠퍼(Anderson Cooper)라는 아들이 있습니다. 미국의 전쟁과 재난 지역 기자로 CNN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쿠퍼는 아이티 대지진, 이라크 전쟁 등 수많은 재난 현장을 뛰어다니며 취재했고. <앤더슨 쿠퍼의 360도>의 앵커를 맡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쿠퍼는 재벌가의 자손이지만 2000억 원이 넘는 재산 상속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내 어머니의 이름은 글로리아 밴더빌트다. 어릴 때 나는 그 사실을 숨기려고 애썼다. 사람들이 내가 어머니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에 나를 먼저 알아봐 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밴더빌트라는 가문의 이름은 가지고 살기에는 무척 불편한 이름이다. 나는 쿠퍼라는 이름으로 사는 게 좋다."

"이 편지를 읽을 때 내가 네 곁에 가까이 있음을 느끼면 좋겠다. 이 편지를 볼 때마다 네가 나를 그리고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을 떠올릴 수 있으면 좋겠다."

"어머니는 인생에서 많은 것을 이루어 내셨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셨어요. 그리고 외할머니께서는 절대로 할 수 없었던 온갖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그 사람들을 포용하셨어요."

                 -'떠나는 자와 남은 자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앤더슨 쿠퍼에게는 형이 있었는데, 20대에 자살했습니다. 글로리아는 그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두 모자에게는 큰 트라우마로 남게 됩니다. 슬픈 일도, 기쁜 일도, 숨겨둔 일도, 사랑한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 글로리아는 91세가 되었고 병원 신세를 지게 됩니다. 이때 우연히 이메일로 어머니와 이야기를 주고받게 쿠퍼는  내친김에 1년 동안 어머니와 평생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그리고 이 편지들은 '떠나는 자와 남은 자의 마지막 수업' 이라는 책이 되어 세상에 알려집니다.


화려하고 부유한 삶 뒤에 숨겨진 어마어마한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 글로리아의 어린 시절이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는지, 또 많은 남자들을 만나며 어떤 일을 겪었는지, 카터가 자살했을 때 두 사람은 어떤 마음이었는지, 열 살 때 어머니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법정에서 다루어야 했던 글로리아에게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얼마나 두려웠는지, 글로리아가 사업가로 크게 성공했음에도 그녀의 가장 가까운 조력자들이 그녀에게 어떤 금전적 사기를 벌였는지 등이 자세히 쓰여 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과 못다 한 이야기를 실컷 한다는 것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돈보다 소중한 것을 생각했고, 수많은 상처와 굴곡을 지나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삶이란 가장 소박한 곳에서 꽃처럼 피어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꼭 할 말이 있다면 오늘 하시면 어떨까요? 말로 하기 어렵다면 글로리아와 쿠퍼 모자처럼 이메일을 활용해 보세요. 너무 미루다 보면 몸이 아파서, 손을 움직일 수 없어서 메일을 쓰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이 가장 소중한 존재와 아낌없이 시간을 보내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글로리아 밴더빌트와 앤더슨 쿠퍼


커버이미지: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중앙 광장의 돔 천장에는 아름다운 별자리가 그려져 있는데, 과거에 수많은 철도 노선이 이곳으로 통했기에 우주의 중심이라는 상징과, 과거에는 별자리를 보고 항해를 했던 navigation의 의미를 담아 그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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