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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eet little kitty Oct 20. 2021

O형 엄마 B형 자식들

육아란 어쩌면 나에게로 돌아오는 길

빨간색 다라이


설렘과 각오로 달음질하는 퇴근길

현관문을 열자마자

풀린 휴지 가득한

김장용 빨간 다라이

다시 잘 감아야 하는 게 오늘의 미션이다

어제는 까고 파고 씹어놓은 귤 반 상자

그저께는 엎질러진 쌀과 섞인 장난감

뚜껑 열린 화장품

풀어 헤쳐진, 개어 놓았던 마른 빨래들

그 빨간색 다라이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도저히 해결 못해서 미루어 둔 사건의 증거들

내 반드시 이 수고를 이 장난질을 기억하리라


적어둔다


오늘은 이경원 작가님의 첫 시집 <O형 엄마 B형 자식들>을 소개하려고 한다.

시집이지만, 세 아이를 키우면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이들 키우던 순간들을 마치 에세이처럼

풀어놓은 책이다.

 표지를 보면 옛날 감성의 육아책 같기도 하고 가족 이야기의 따스함만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열어보면 그 안에 팔딱팔딱 뛰노는 물고기의 생동감, 평범한 순간을 잘 포착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날카로움, 그리고 인생에 없어선 안 될 양념 같은 유머코드가 있었다.


<빨간색 다라이>는 읽기만 해도 성난 엄마의 표정이 그려지고, 그 순간을 되돌아보며 킥킥 웃고 있을 온 가족이 떠오른다. 직장에서 퇴근하고 온 엄마의 얼굴을 앵그리버드로 바꾸어 놓을 만한 이 사건이, 시로 표현하는 순간 아름다운 추억으로 승화되었다.


재산싸움


육아 시집에 웬 충격적인 제목인가 했더니,

첫째와 둘째가 서로의 가방을 열어보며 마음에 드는 물건을 차지하려고 가져갔다 가져오는 내용이었다.


<중략>


인형 그린 구겨진 공책

풍선껌 종이

색종이로 접은 당근

까만 고무줄

옷에 달려있던 가소로운 브로우치


이것이 자매들의 귀하디 귀한 재산이다. 심각한 표정으로 읽어 내려가다가 웃음이 터진다.


짝사랑


동네 모퉁이

사춘기가 무르익은 아들

친구들은 흐릿하게

특수효과로 처리된 내 눈 안으로

그가 들어온다

끌려가듯 달려가

다른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아이가 비껴간다

부끄러움으로 마른

혀를 입천장에서 겨우 떼어 낸다


볼을 대고 매일

심장 소리를 들려주는

순한 얼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친구들 있는 데서는 들이대지 마쎄요오


소통 전문가 김창옥 교수는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면 가까이 있는 사람도 멀리 있는 사람처럼 본다' 고 했다. 바로 이런 장면이 아닐까, 가까이 있는데도 시야에서 달아날까 자세히 뜯어보고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아껴 보고 또 보고.


여기까진 애틋하고 좋았는데 갑자기 마지막 아들의 대사에서

현실로 퍼뜩 돌아온다.

아들을 향한 엄마의 짝사랑은 그렇게 <들이대는> 일이 되어 버린다.


<진통제 여섯 알>은 제목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무리 아파도 여섯 알을 한꺼번에?' 하는 마음으로 읽어 내려간 시는, 새끼발가락이 부러진 엄마가 세 아이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며 진통제 삼아 남이섬 여행을 다녀오는 내용이었다. 일러스트의 아이들 눈동자가 얼마나 예쁜지, 국자에 담겨 있던 별들이 하늘로 날아가 북두칠성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O형 엄마, B형 자식들


사소한 것도 이유를 달아

에둘러 부탁하는

O형 엄마

명령문으로 말해달라는

B형 자식


열심히 살고 있다고

취미생활 자랑하는 엄마

그 분야를 잘 모르니

할 말이 없다는

똑부러지는 자식


마음 알아달라고

이 말 저 말 붙이는 엄마

그래서

요점은 무엇이냐고 묻는 자식


삼십 년 전 B형 남편한테 들었던

그 대사를


어떻게 알았을까


어떻게 알았을까? 미소가 지어진다.


투 레이트


사느라 바빠서 그러했노라고

그땐 나도 젊어서 몰랐을 거라고

일 개 한 점 같은 사람이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수고하느라 안간힘을 썼노라고

어리석은 욕심에 조급했었다고

수십 가지 변명을 준비해도 소용없다

자식에게 부모는 지각투성이


웃다가 이 시 앞에선 눈물이 난다. 나도 아이들이 다 크고 나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될까?



코로나라는 화두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시기에, 나는 어린 시절의 내 아이들에게로 시간여행을 다녀왔다.

                                                                                                     

                                                    -  작가의 감사의 말 중에서


우리 모두에겐 어린 시절이 있었다. 육아는 처음이지만 어린 시절은 엄마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아이를 키우는 일 또한 시간 여행이다. 끊임없이 나의 과거를, 어린 시절을 곱씹어보고 비교해보는, 케케묵은 감정들이 올라오는 그 쉽지 않은 여정을 마친 이경원 작가님은 다시금 그 시간으로 시간여행을 다녀온다. 읽는 나 역시 그 여행을 함께 하게 된다.


프렐류드*


쉽고 단조로운 또렷한 음표

악기가 소리를 내면

뜻밖의 세상이 열린다


부단한 연습으로 다다른 음높이

사이사이

숨의 깊이를 정할 수 없는

완성의 소리


아무리 익숙해도

'새로 고침'으로 설정되는


내 하루 같은

내 인생 같은


*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중 첫 번째 곡


그리하여 엄마는 엄마의 인생으로 돌아오게 된다. 결국 종착지는 나였던 가보다. 성인이 된 후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을 아이들을 키우며 한 번 더 살아간다. 그 끝에는 내가 있다.

아무리 익숙해도 <새로 고침>으로 설정되는

 인간의 뇌는 변화가 없는 것을 0으로 인식한다고 한다. 그대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의 정보를 계속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변화된 값만 정보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새로 고침>에는 '변화'라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미 새로 고친 시각이, 나 자신이, 내 주변이 달라져 있다. 그 변화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아이들이었을 것이다. 첫 아이, 둘째 아이, 셋째 아이. 그리고 한 살의 아이, 일곱 살의 아이, 열한 살의 아이, 스무 살의 아이....... 모든 것은 늘 새로웠고 그 변화는 엄마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이제 시간 여행을 마치고 나에게로 돌아올 시간이다. 바흐의 곡이 대개 그렇듯 <프렐류드>는 규칙적인 반듯함 속에 감동과 아련함이 있다. 고독 속에 듣기 딱 좋은 음악이다.


 아기 새들을 보듬고 품어주던 나무는 이제 세상을 향해

두 팔 벌리고 하늘을 바라봐도 된다. 더 이상 누군가를 감싸기 위해 허리를 굽히지 않아도 된다. 오랜동안 땅을 향했던 시선을 이제 하늘로 올려다보자. 그리고 새로 고침을 하자.

나에게로 돌아오는 길.

아이들에겐 아름다운 성장을, 엄마에겐 아름다운 성숙을 가능하게 해 준 그 길에 감사한다.


이경원 작가님의 아름다운 첫 시집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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