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심리학을 공부하던 중 너무 좋은 구절이 있어 인용해 본다. <아이의 공격성은 잔인한 사랑> 편에서 언급했던 내용의 심화학습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Kohut은 아이가 겪는 좌절을 감당할 수 없는 좌절과 감당할 수 있는 좌절로 분류하였다. 비록 좌절이긴 하나 아이가 감당할 수 있어서 아이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 때, 이를 <최적의 좌절(Optimal Frustration)>이라고 불렀다.
상처가 되는 좌절과 최적의 좌절이 어떻게 다른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절대 안 돼!"라고 사납게 소리치는 것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그건 안 돼요."라고 부드럽게 금지하는 것은 후자에 속한다. 분노 발작을 일으키는 아이에게 똑같이 분노 발작하듯 소리치고 때리는 아버지와, 흥분한 아이를 품에 안고 엄격하나 공격적이지 않게 또 따뜻하나 자극적이지 않게 진정시키는 아버지가 서로 다른 예가 될 수 있다.
아이의 행동을 제지할 때, 타협이나 절충 없이 오직 무엇을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단호하게 금하는 것과, 금하는 행동 대신 받아들일 만한 대체 행동을 제시하는 것이 둘의 차이를 나타내는 또 다른 예가 된다.
아이의 심리가 견뎌 낼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서는 좌절에 부딪쳤을 때 유아의 욕동과 좌절당한 기억은 무의식 속으로 차단된다. 좌절된 유아의 욕동을 의식에서 경험할 때 생기는 불안과 절망감을 막기 위해서다. 무의식에 차단되어 있다고 해서 유아의 욕동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쾌락 원리에 의해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한다. Freud가 설명했던 구조이론과 동일한데, 즉 id의 욕동은 ego의 억압과 방어에 의해 무의식에서 억압된다.
무의식에 차단되어 있으나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던 과거의 소망은 분석가에게 잘못 연결되어 전이 감정을 형성하게 된다.
Kohut은 상처가 되는 좌절이 가져오는 이런 결과와 달리, 최적의 좌절은 점진적인 중성화(progressive neutratlization)를 가져온다고 설명하였다. 최적의 좌절 상황에서 유아는 자신을 진정시키고 안정시켜 주는 부모와 그 태도를 내재화하는 과정을 통하여 점진적인 중성화를 진행해 간다. 그 결과 욕동을 억제할 수 있는 심리구조, 즉 중성화된 기억들과 중성화된 내적인 힘들로 구성된 중성화된 심리영역이 형성된다.
유아의 건강한 심리구조가 형성되기 위해선 상처를 주지 않는 적절한 부모의 양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Kohut은 유아의 심리구조를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원천이 부모의 OO이라고 생각하였다.
최영민 저, <쉽게 쓴 자기 심리학> 중에서
OO 에는 어떤 단어가 들어가야 할까?
정답은 '인격'이다.
여기서 인격이란 어떤 높은 도덕적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라기보다, what to do가 아닌 who is, '부모가 어떤 이미지로 아이의 마음에 남게 되는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조금 못 해 주는 부모여도 괜찮다. 최고의 교육환경, 최고의 경험, 최고의 인맥,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없어도 된다는 뜻이다. 그것은 아이의 심리구조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 날 교수님은 "왜 어떤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부모가 큰 소리로 무섭게 소리치면 안 되는 것일까요?"라고 질문하셨다.
영유아 검진 때 비슷한 맥락의 질문을 많이 받았던 기억이 난다.
교수님의 답은 다음과 같았다.
부모가 너무 강하게 윽박지르면, 아이는 그 순간 <좌절은 경험하나 대상을 느낄 수 없다>.
대상을 느껴야 내재화할 수 있고 부모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대상을 느껴야 <우리 부모님이 나를 사랑해서 그렇게 혼내시는구나>하고 부모의 말을 새겨듣게 될 것이고, 자신만의 언어로 소화 흡수하면 성인이 되어서도 그 가르침은 빛을 발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재화의 과정이다.
상처가 되는 좌절을 자꾸 반복해서 주게 되는 것은 아마도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가 그것이기 때문이리라. 또한 내 마음 한 구석에 차단된 예전의 소망이 남아 있기에, 그것을 이루지 못한 분노와 억울함이 남아 그러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나는 의식적으로 연습해 본다. 현재 우리 집 상황에 맞는 <최적의 좌절>은 무엇일까.
한 때 나의 모습이었던, 좌절 자체를 피하는 엄마와 상처가 되는 좌절을 주는 엄마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싶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 책을 읽으며 홀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