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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eet little kitty Mar 16. 2022

직장맘이냐 전업맘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삶의 중요한 순간에 스스로를 자리매김하는 방법

지난주 화상 강의로 심리학 수업을 듣던 중


<직장맘의 자녀 중 자해 성향 등 문제 행동이 자주 발견되는데, 그럼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이 나왔다.


교수님은

 "최근 연구는 아니지만, 직장맘의 자녀가 전업맘의 자녀에 비해 양육 과정 중에 유의미하게 큰 문제가 있지 않으며, 양육 도우미 손에서 큰다고 해서 문제가 더 발생하지는 않는다는 고전적 연구가 있다"

"엄마 역시 자기애적 욕구를 가진 존재이므로, 특히 현대 사회에서 자기실현 욕구를 억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고 대답해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 현장에서 상담을 담당하고 있는 다른 선생님은 한숨을 쉬며 말한다.

"하지만 아이가 큰 문제 행동을 보이고 있는데도 엄마, 아빠가 입을 모아서 그건 절대 안 된다. 엄마의 커리어는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다고 한다. 이것이 요즘 엄마들이 예전 엄마들과 다른 점이다. 참 안타깝다."


나는 이 주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바로 내가 최근까지도 그 문제의 당사자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발달을 본능적 에너지가 스스로 신체적으로 표현되는 관점에서 설명하였다. 즉 발달 시기에 따라 본능적 목표물이 달라지는 정신성적 단계(Psychosexual development)들을 설정하였다.

이에 비해 Klein은 관계성(relationship)의 관점으로 발달을 이해하였다. 아이에게 세상은 좋음/나쁨으로 이분화되어 있기에 나쁨에서 좋음으로 건너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좋은 곳 혹은 나쁜 곳에 자신을 자리매김해야 한다.
즉 좋은 대상 혹은 나쁜 대상에 자신을 위치시킨 후 대상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여러 모습의 자기 자신을 새롭게 자리매김해 간다. Klein은 이러한 아이의 경험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서
자리(posi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최영민 <대상관계 이론을 중심으로 쉽게 쓴 정신분석이론> 중에서



멜라니 클라인의 편집-분열 자리우울 자리를 설명한 책은 많지만, '자리'라는 용어의 의미에 대해서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책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 구절을 참 좋아한다.


스스로를 자리매김한다.

인생에는 물론 발달단계도 존재할 것이다. 우리가 받아온 교육은 자리매김보다는 발달단계에 따라 하나씩 앞으로 나아가고 맞추어 가는 형태가 더 많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나에겐 자리매김보다 발달단계가 더 익숙하다.


내가 자리매김이라는 용어를 떠올린 것은 일을 잠시 내려놓고 육아에 에너지를 쏟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현재 어려움이 있으니 일을 잠시 내려놓고 육아에 집중해 보면 어때요?>

라는 전문가의 조언은 <24개월-36개월 이전부터 어린이집을 다니면 중이염 등 각종 호흡기 감염에 쉽게 노출되는데 조금 늦게 가면 어떨까요?>라는 소아청소년과 의사의 마음과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막상 내가 당사자가 되어 보니 이 상황에서는 <죄책감>이 발동하기 쉬웠다. 사례의 어머니 역시 그 순간만큼은 자동 사고로 죄책감이 발동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본다. 상담사 선생님은 거의 초면일 테고, 잘 모르는 사람에게 <내가 도대체 어떻게 보일까?>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들 수 있다.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에게 죄책감을 유발하지 않고 조언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본다.

모든 전업맘이 모든 직장맘보다 더 좋은 양육을 한다는 근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같은 사람이 같은 방향과 같은 마음으로 어떤 일을 한다면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을 때 그 직업에서 당연히 좋은 성과를 내듯, 양육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 점을 생각해서 한 번 고려해 보세요.


 또, 요즘 엄마라고 표현하신 바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어머니의 선택은 순수한 자기실현 욕구뿐만 아니라 시대 문화적 압박이 더해져 있을 터이다.

 예를 들면, 시댁이나 남편이 <경제활동하지 않는 여성>을 존중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지난 설 명절 브런치를 뜨겁게 달구었던 <명절에 당연시되던 며느리의 가사노동> 관련 글들에서, "맞벌이는 명에 쉴 수도 있지만 전업주부는 해당 없다. 시대가 바뀌어도 하던 일은 계속해야 한다."는 댓글을 많이 보았다. 물론 일부의 생각일 수 있다. 하지만 당장 돈으로 보상받지 못하는 전업주부의 노동이 "하는 게 뭐가 있다고"라는 한 문장으로 압축되는 경우를 보면서 참 씁쓸했다.

 여성 본인이 과하게 느끼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잠시 육아휴직을 하면서 예전에는 소비했던 것을 확 줄이고 나를 위한 소비를 전혀 하지 못하겠다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여성의 친정에서 이를 반기지 않을 수 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일을 그만두니?> <똑같이 공부시켰는데 내 딸만 희생하는 건 억울해서 못 본다>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연봉이 높거나 고학력인 경우, 또는 친정에 경제적 도움을 드리고 있는 경우에는 특히 이런 압박을 받기 쉽다.

 마지막으로 속해 있는 사회 집단에서 소외될 수 있다. 단순한 경력 단절뿐 아니라, 직장과 상관없이 지내는 어린 시절 친구들조차도 직장맘이 우세인 모임이라면 전업맘을 <편해서 좋겠다.> <남편이 많이 버니까 여유가 있나?> 등으로 농담 아닌 농담이 오고 가고 서로를 구분하고 상처 주는 경우가 생긴다.


바로 이러한 것이 시대 문화적 압박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우리 가정에, 우리 아이에게 생긴 어려움은 시대적 과제가 아니다. 그건 우리 아이에게 생긴 우리 가정의 특수하고 개인적인 사정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적 존재이기도 하지만, 나에게 생긴 특수한 상황에서는 나만의 선택을 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나의 경우도 마지막으로 다녔던 직장은 만족도가 높았고 1년 반 정도 자체 휴직을 하다가 새로 시터를 구해 나간 경우였으므로 다시 용기를 내어 어렵게 구한 소중한 곳이었다. 재계약 한지 한 달만에 그만두겠다는 말을 해야 했던 내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착잡했다. 무급 휴직 제안마저도 거절해야 할 만큼 아이가 심각한 증상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우리 아이를 진료해 주었던 선배 의사 선생님도 교수님과 비슷한 말씀을 해 주었다.

 <무조건 그만두지 말고 놀이치료를 조금 해 보고 결정하면 어때? 우리 아이들도 엄마가 일하지만 할머니 할아버지가 키우면서 충분히 잘 키울 수 있는 것 같은데......>


 결국 일을 계속할 것이냐 잠시 쉴 것이냐의 문제는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이 자리매김인지가 중요하다.

 만약 내가 주체적 판단으로 일을 이어나가기로 했다면, 다른 부분에서 내려놓을 것이 있을 것이다. 아이와의 시간을 늘리기 위해 사교육을 줄일 수 있다. 승진을 포기하더라도 파트타임으로 돌려줄 것을 직장에 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눈치가 보일지언정 유연근무를 신청할 수도 있다. 다만 나의 판단에 시대 문화적 압박, 즉 타인의 시선이 얼마나 작용했는지 가만히 삶을 돌아보고 주변의 소리에 귀를 닫아보자.


 단순히 직장맘과 전업맘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때로 나의 전부일 것 같은 정체성을 쥐고 산다. 직업, 사회적 지위, 명예....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나의 삶 전체를 보았을 때 시기마다 주어지는 부분적 정체성이 아닐까.

나는 <나>이고, <나>로서 살아가기 위해 세상에 왔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물려받는 것은 금 혹은 흙으로 된 수저가 아니라 바로 <나의 삶>이다. 누군가의 무엇이 되기 위해 세상에 온 게 아니라 <나의 삶>을 하나씩 공평하게 받아 그것을 살아내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라고. 그렇게 믿으며 살아가고 싶다.


삶의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스스로를 자리매김하는 데 고민이 많은 모든 이에게 응원을 보낸다.

당신의 선택은 언제나 옳고, 언제나 정답이라고. 후회되면 다시 선택하면 된다고.

그리고 나의 선택에 타인의 시선이 얼마나 영향을 주고 있는지 한 번 더 생각해 보라고.


오늘도 언제쯤 풀타임 근무의 내 직업으로 돌아갈지 고민하는 나를 위해서, 일부 차를 타고 직장인들을 많이 볼 수 있는 거리로 가서 커피를 마신다. 그들의 기운이라도 받고 싶어서.

예전에 여기 왔을 땐 잘 차려입은 정장 차림의 활기찬 젊은이들을 많이 보았다. 그런데 지금은 아주 편한 복장의 다소 어두운 표정을 한 젊은이들이 하나같이 담배를 태우고 있다. 코로나 이전과 이후의 차이일까, 산업구조의 변화일까. 내가 생각했던 활기차고 세련된 분위기는 아닌 듯한데......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듯 어떤 이의 삶도 그러할지 모른다.

지금 내가 마시는 한 잔의 커피가 너무 포근하고 맛있어서 눈물이 난다. 이것만으로도 오늘은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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