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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eet little kitty Dec 30. 2021

계단 말고 엘리베이터?

때로는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으로

따뜻하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사람들을 위로해 주는 가수 임영웅의 노래 중에 <계단 말고 엘리베이터>라는 곡이 있다.


터벅터벅 그 걸음으로

어느 세월에 내게 오나요

저 푸른 하늘 새들처럼

날개를 달고 와야죠

이리저리 돌아보면서

어느 천년에 내게 오나요

더 늦기 전에 돌아와요

빨리빨리 오세요


<후렴 생략>



나에게 엘리베이터란 편하고 빠르기만 한 존재는 아니었다.

어린 시절 내 동생은 엘리베이터를 무서워했다. 엄마는 무서워하는 아이를 안심시켜 주거나 공감해주지 않고 화를 냈다. 간혹 백화점에 있는 전망용 엘리베이터라도 타게 되면 너무 무서워서 동생이 얼굴도 돌리지 못하고 덜덜 떨었던 기억이 난다.


 외할머니 댁에 가는 날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외할머니 댁은 아파트지만 산자락에 있었고, 우리는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주로 갔다. 입구에서 가장 멀리 있는 안쪽 동이어서 오르막길을 한참 걸어가야 했고, 복도식 아파트라 오픈된 복도 공간 역시 무서웠다.


 아이들을 낳아 키워보니, 할머니 할아버지라고 해서 무조건 따르거나 좋아하지 않았다. 할머니네 집에 가려면, 가 는 길이 힘들지 않아야 하고, 아이들의 민감한 감각을 건드릴만큼 비위생적이거나 공포스러운 환경이 아니어야 했다. 가고 싶을 만큼 재미있는 것이 그 안에 있어야 가게 되는 거였다.

뒤집어 말하자면 내가 어릴 때 양가 할머니 댁은 모두 어린아이들이 좋아하지 않을 곳이었고, 그럼에도 불만 한 번 표현하지 못하고 조용히 따라가서 어른들이 좋아할 만한 행동을 하며 심지어 부엌 일도 거들었던 것 같다.

지금 우리 아이들과 비교하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그 수많은 날 들 중 하루가 유난히 기억난다. 외할머니 댁에 엄마와 동생, 내가 갔던 날 엘리베이터를 한사코 타지 않겠다던 동생 때문에 난리가 났다. 결국 타고 올라갔지만, 엘리베이터 안에서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던 엄마의 모습과 동생의 울음소리가 기억난다. 물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밀폐된 공간에서 일어났던 그 갈등과 불안은 나의 기억에 회색빛으로 진하게 남아있다.


시간이 흘러 나도 엄마가 되고, 큰 딸아이가 상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학원을 다녔다. 원래 엘리베이터를 무서워하기도 하지만, 8층까지 가야 하는데 사람이 붐비는 낡은 엘리베이터가 너무 타기 싫다고 했다. 그날 나는 비교적 에너지가 있었고 늦었지만 계단으로 가보자고 했다. 낯선 사람들과 끼어서 문도 갑자기 닫혀 버리는 그 엘리베이터를 타느니 아이는 춥고 담배 냄새나는 계단이 낫다는 거였다.


아이와 함께 8층까지 올라갔을 때, 나는 새삼 깨달은 바가 있었다.

한 가지는 이 무서워하던 외할머니네 아파트에서 우리는 천천히 계단으로 가도 되었다는 것.

두 번째, 심장 판막 역류가 있는 나는 지금 너무나 숨이 차다는 것을.


아이를 들여보내 놓고 생각한다. 내가 그때 몇 살이었는지 모르지만 나라도 동생과 함께 계단으로 올라갔으면 될 것을. 물론 엄마 생각에는 그것도 부모로서 석연치 않다고 생각해서 못하게 했을지도 모르지만,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계단으로 올라가지 못했을 리는 없다.

 또 한 가지, 내가 숨이 이렇게 차듯이, 엄마도 숨이 많이 찼을 것이다.

왜냐하면 엄마도 심장 판막 질환이 있수년 전 큰 시술을 받았고 내 경우보다 훨씬 병적이었기 때문이다. 아빠와 함께 왔으면 차를 가지고 올라왔을 오르막길을, 버스 정류장부터 걸어왔으니 이미 숨이 찰 대로 찼을 것이다.

 게다가 내 경험상 아이가 엄마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행동을 할 땐, 평소보다 심장이 빠르게 뛴다. 엄마도 아마 그 순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런 유연한 생각을 할 수 없었겠지.


 아이 역시 그 학원을 조용히 다니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매번 차로 데려다주고 기다렸다가 데리고 왔다.

학원 앞까지 가서도 들어가지 않겠다고 떼를 쓰며 우는 날도 있었다. 괜찮다고 데리고 도로 집에 가려고 해도 꼼짝 않고 그 자리에서 우는 마음을, 알면서도 버텨주기 힘들었다. 내 아이도, 내 동생도 그렇게 힘든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날의 죄책감을, 나라도 할 수 있었던 일을 하지 못한 것은 내가 아직 어려서이기도 했겠지만 늘 이런 상황에 얼어붙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있는 것이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제 어른이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위치가 되었다. 비록 숨이 차서 힘들지만, 때로는 이렇게 할 수도 있다는 걸 또 한 번 깨달아간다.


그날 엄마의 마음이 너그럽지 못했던 것은, 아마도 외할머니 댁에 가는 것이 엄마로서도 괴로운 일이어서 그랬을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외할머니는 자식들에게 감정적인 서운함을 아이처럼 드러내는 분이셨고, 엄마는 그 반대로 행동하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마음은 같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아이 둘을 데리고 남편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어리광이 많은 친정 엄마를 만나러 가는 것은 절대로 유쾌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몸도 마음도 지쳤을 우리 엄마의 그날과, 두려운 마음을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채 그 엘리베이터를 타야 했던 동생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한 나.

나는 지금이라도 내 아이에게 할 수 있는 것을 해 주며 또 그 시간을 지나가 본다.


아이를 키울 땐, 특히 내리사랑일 땐 엘리베이터보다 계단 같은 사랑을 하고 싶다.


출처 https://m.blog.naver.com/kshs35/222390654408


       

커버 이미지 출처

https://m.blog.naver.com/titico2/221153648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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