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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eet little kitty Mar 07. 2022

취향에 대한 존중

라벤더색 운동화를 갖게 되다

새로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모 백화점에 남편과 쇼핑을 갔다.

나는 백화점에 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 일을 기획한 것은 당연히 남편이다. 나는 일단 사고 싶은 게 별로 없다. 있어도 비대면 쇼핑이 편하다. 그리고 코스트코나 백화점처럼 천정이 높고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전쟁통에 방공호에 들어온 느낌이 들어 무섭다.


어제는 거기에 더해 주차장 진입로가 무서웠다. 타 백화점보다 진입로가 좁고 동굴처럼 생겼다. 나는 바닷물에 잠기는 상상을 하며 잠시 공포에 젖어 있었다.


 반면, 남편은 완벽한 쇼핑 계획을 세워 왔다. 이미 혼자서 지난주 여기에 왔었고 사고 싶은 물건, 보고 싶은 물건, 먹고 싶은 음식 리스트가 머릿속에 빼곡히 들어 있었다.


 나는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시각, 청각적 자극과 싸우느라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것도 힘들다. 하지만 남편이 보고 싶은 매장을 찾아다니다가 우연히 내가 갖고 싶어 하던 보라색 컨버스화를 발견했다.


시즌이 지나서 사이즈 구하기 힘들다며 여기저기서 거절당한 그 운동화가 전시되어 있다. 혹시 사이즈가 있을까 직원에게 물어보니 "딱 하나 남았어요." 라며 빛의 속도로 가져다준다.

나는 주변인처럼 어슬렁 거리다가 갑자기 주인공이 된 사람처럼 운동화를 신어 본다. 발에 딱 맞는다!


나에게 보라색은 사연이 있는 색이다.

어린 시절 부모님은 소소한 즐거움이나 솔직한 욕구를 표현하지 못하게 했다. 당연히 충족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무언가를 가지려면 원한다는 표현을 목이 터질 듯이, 눈치를 봐 가며 반복적으로 해야 했다. 나는 여자아이였지만 예쁘게 꾸미는 것이 죄악시되는 집안에서 자랐다.


 초등 4학년이 되던 해, 친한 친구가 보라색 귀걸이(귀찌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다)를 선물해 주었다. 너무 예뻐서 집에서 해 봤는데, 그걸 발견한 아빠가 갖다 버리라며 빼앗았다. 그런 건 허영심이고 나쁜 거라고.

지금 생각하면 너무 분하고 어이없는 일이지만 나는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이미지 출처 https://shop phinf.pstatic.net/20220226_203/1645885767295K24Kl_JPEG/main-87884.jpg?type=o640


아빠는 왜 하나밖에 없는 딸이 예쁘게 꾸미는 걸 싫어했을까?

정당한 설명이나 근거 없이 아이의 소소한 욕구를 억압하는 일. 아마도 아빠가 어릴 때부터 반복되어 온 할아버지의 양육 방식이었을 것이다. 4남1녀 중 장남인 아빠는 섬세하고 예민한 성격이었고, 할아버지는 그런 아빠를 장남이라는 이유로 높은 기대치와 혹독한 교육방식을 택했던 것 같다.

아빠는 자전거를 볼 때마다 <자전거가 타고 싶었는데 할아버지가 사 주지 않았다. 사촌의 자전거를 몰래 타 봤다가 크게 구박당고 서러웠다>는 이야기를 자주 다.


 보라색에 대한 내 마음은, 혹은 나를 꾸미는 행위에 대한 내 마음은 참으로 양가적이다. 너무 그립고 집착하게 되면서도 일부러 포기해 버린다. 상처받을까 봐.

그 보라색 운동화도 그랬다. 너무 예뻐서 누가 신던 거라도 사이즈가 있으면 사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지만 나는 쉽게 사이즈가 있냐고 물어보지 못했다.


"물어봐, 물어보라니깐.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내가 여기 백화점 오면 물건 있을지도 모른다 했잖아. 진작 데려올 걸."


지금 내 옆에 있는 남편은 나를 다른 방식으로 대한다. 원하는 것에 좀 더 솔직해지라고.

신기하게도 결핍은 알고 채워갈 때 훨씬 더 잘 채워진다. 

이것으로 나의 쇼핑은 끝이다.


카페 의자에 앉아 남편이 쇼핑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무거워서 주차장까지 들고 가기도 쉽지 않을 양이다.

아직도 다른 층에서 구경할 리스트가 몇 개 더 남아 있다. 나는 다리가 아프지만 따라가야 할 것이다.


 나에게 보라색에 관한 사연이 있듯 남편에게도 어린 시절 쇼핑과 관련된 어떤 사연이 있는지 모른다.

새로운 자극을 좋아하고 외출을 즐겨하는 남편의 취향에 맞추 것은 내게 쉽지 않은 일이지만, 오늘 하루 상대의 취향을 존중해 주었기에 나는 오늘 저녁 웃으면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남편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양손 가득 많은 물건을 들고 3시간 가까이 쇼핑한 뒤 왕복 1시간 거리를 운전하는 남편은, 아직도 에너지가 넘치고 '오늘 정말 재미있었다.'는 말을 반복한다.


나는 백화점 쇼핑을 좋아하는 남편을 둔 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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