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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eet little kitty May 21. 2022

특별한 사람

훌륭해지기보다 특별해지고 싶은 아이

"엄마, 학교에서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생각을 깊이 해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대."


"그래?"


"응, 근데 나는 딱히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아."


"(음.. 역시 범상치 않은 대답이군..... 설마 학교에서 그런 얘길 한 건 아니겠지?)

  그럼 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데?"


"음.....

 특. 별. 한 사람."


"......."



그렇다.

아이는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한다.

여기서 특별함은 아마도 순위로는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남다름' 일 것이다.

이 시대 많은 한국 부모들이 바라는 것은 아이의 삶이 <남들처럼> 되는 것과 <그러면서도 경쟁을 통해 매겨진 순위로는 상위권> 이 아닐까. 반면 우리 아이들은 <남다름, 독특함>을 좋아한다. 보통의 부모로서는 그리 달갑지 않을 수도 있는 특징이다.


 아이 스스로가 좋아서 '내가 잘나고 싶다'는 것과 부모가 '너는 꼭 일등을 해야만 한다'라고 하는 것은 질적으로 다르다.

 아이를 최고로 키우고 싶고, 부모의 자랑거리가 되어주었으면 싶은 것이 모든 부모들의 소망일 것이다. 이러한 나르시시즘이 없다면 어떻게 그 힘든 여정을 감히 밟아가려 하겠는가.

육아를 견디게 하는 적절한 부모로서의 나르시시즘을 가지면서도 내 아이를 공허한 아이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꼭 지켜주어야 할 것이 있다. 아이가 잘했을 때, 진심으로 기뻐해 주어야 한다. 남에게 자랑하려 하지 말고, 그 기쁨을 먼저 아이와 나누어야 한다. 충분히 행복하게 해 주어야 한다.

박경순, '엄마 교과서' 중에서

 작은 딸이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한 것은 아마도 아이의 건강한 자기애가 아닌가 싶다. 훌륭하다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아이는 <훌륭하다>로 대표되는 타인의 나르시시즘을 거부하고 스스로 자기애적 구조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게 아닐까.


Kohut은 생의 아주 초기부터 공감적이고 반응적인 어머니와 연결된 상태에서 아기가 더할 수 없이 행복한 삶을 시작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완벽한 어머니라 하더라도 아이의 생리적이고 심리적인 욕구를 완전히 만족시켜 줄 순 없다. 최초의 완전했던 행복을 다시 찾길 바라는 자기애적 욕구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된다.

Kohut은 '나는 완벽해요.'와 '당신은 완벽하고, 나는 당신의 한 부분이에요.'가 기본적인 자기애적 구조라고 설명하였다.

최영민, '쉽게 쓴 자기 심리학' 중에서


 나는 궁금했다. 부모로서 내가 무엇을 해 주어야 하는지. 

나는 모유가 분유보다 좋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면서도 모유가 나오지 않아 먹이지 못했다. 아이가 자라면서 엄마들끼리 모임을 형성하고 좋은 사교육 정보를 알아내지 못했다. 좋은 학군으로 이사 가서 최고의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계속 일을 해서 돈을 벌지도 못했다. 아이를 체계적 교육과 경쟁으로 이끌어 주는 것도 내게는 영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것들을 잘 해낼 수 없었다.


 대신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공부하기 시작했다. 부모는 무엇을 해 주어야 아이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랄까. 50년 전, 100년 전에도 고민했던 수많은 대가들의 이론은 오늘날에도 적용될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자기 심리학의 대가 Kohut은 아주 명료하게 그것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첫째, '나는 완벽해요.'로 표현되는 <과대 자기 욕구>에 반응해 주어야 한다.

만 3세까지는 충분히 그 나르시시즘을 채워 주어도 된다. 그 나르시시즘은 엄마 교과서에 의하면 '무리 중에 네가 최고다.'가 아니라 '나에게 넌 최고다.'였다.

둘째, '엄마는 완벽하고, 나는 엄마의 한 부분이에요.'라는 <이상화 부모 이마고>를 채워 주어야 한다.

부모로서 지혜롭고 강한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불안할 땐 진정시켜 줄 수 있어야 한다. 이를 통해 아이는 긴장을 조절하고 이상을 형성하게 된다.


1913년에 태어나 1981년에 생을 마감한 Kohut이 <진정시켜 주는 것>에 대해 2022년을 사는 부모들이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답을 내놓지는 않았기에, 내 나름대로 생각해 본다.


오늘날의 부모들은 1900년대 초반의 부모들에 비해 너무 많은 것을 비교당하고 너무 많은 것을 요구받는다. 사회가 복잡하고 타인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너무 많기에 박탈감을 쉽게 느낀다. 여기서 오는 근원적 문제는 불안이 아닌가 한다.


"수학학원도 보내야 하는 거 아니야?"

"남들 다 하는데 안 해도 돼?"

"그래 가지고 앞으로 집 한 채나 사겠어?"


 아이가 아주 어릴 땐, 부모가 불안해하는 것이 아이의 보호로 이어질 수 있으니 꼭 필요한 덕목일 것이다. 불안이 없는 부모는 아이를 겁 없이 방치할 수 있고, 아이는 사고와 범죄에 노출될 수 있다.

하지만 아이가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엔 직접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 훨씬 더 많기에, 부모의 걱정은 대부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부모를 걱정시키는 부족한 존재>라는 생각을 심어주기 쉽다.


 따라서 부모로서 아이를 진정시켜 준다는 것은 함께 불안해하거나, 아이보다 더 불안해하는 것이 아니라 들어주고 버텨주는 것이다. '직접 개입할 수 없는 아이의 문제'에 아이보다 더 불안해하는 대신 '들어주고 버텨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현대 사회의 부모들은 더 많은 불안에 노출되기 쉽기 때문이다.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은 나의 딸에게

'그럼, 넌 분명히 특별한 사람이 될 거야.'라고 말해 주고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아 속상할 땐 옆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버텨주는 부모.


그것이 내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부모다.


전쟁과 여러 가지 이유로 부재했던 아버지와, 아들을 사랑하지만 지나치게 지배적인 어머니 밑에서 정서적 결핍을 겪은 덕에, <공감적 부모>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건강한 자기애>라는 개념을 열어준 위대한 정신분석가 Heinz Kohut에게 깊은 감사와 존경을 표한다.


 그리고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우리 아이에게, 오늘부터 <특별한 일>을 한 가지씩 해 보도록 권유한다.

고양이가 상전이고 아이는 단정히 무릎을 꿇고 모시는 분위기.

예를 들면, '고양이에게 책 읽어주기'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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