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 때의 일입니다. 아이가 하루 종일 방 안에서 노트북만 붙잡고 있길래 그만 좀 보라고 했습니다. 아이가 잠들면 노트북을 가지고 나오기도 했지요. 그런데 방학이 끝날 때쯤, 아이는 갑자기 묻습니다.
"엄마, 어떻게 해야 책을 낼 수 있는 거야?"
"왜?"
"내가 방학 동안 소설을 썼는데 책으로 갖고 싶거든. 책 내는 거 어려우면 나는 개인 소장용으로 책처럼 인쇄해 줘. 내용은 보지 말고, 알았지?
내용을 보지 말고 책처럼 인쇄라...
참 어이가 없었습니다. 아이는 제가 2쪽씩 모아 찍기 해 준 것을 받아 들더니 책처럼 양면으로 딱 떨어지지 않는다며 불평했습니다. 소설의 제목은 <쓸모없는 존재>, 가족과의 단절로 외롭게 살며 자살 충동을 느끼던 중학생이이성친구를 만나면서 삶의 의미를 찾아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직은 대화체의 각본 같은 글이지만 A4 20페이지분량의 소설이었지요. 중간중간 멋진 문장도 있었습니다.
타자도 느린 녀석이 독수리 타법으로 저렇게 긴 글을 쓰고 있었다니 놀라웠습니다. 그토록 독서논술 수업을 권유할 때는 싫다더니, 소설을 쓴다고요?
그 후로 아이는 '어떻게 하면 소설을 잘 쓸 수 있냐'라고 묻더니(그걸 제가 알 리가 있나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추리, 공포 장르를 즐겨 씁니다.지금은 <붉은 달이 뜨는 밤>이라는 추리소설을 블로그에 연재(?)하고 있네요.
2학기가 되니 학교 알림장에 A 예고에서 예술영재학급을 선발한다고 공지사항이 올라왔습니다. A예고는 문예창작과가 있는 몇 안 되는 학교입니다. 학년 구분하지 않고 내년 중 1, 2, 3학년 될 학생 중15명을선발한다고 합니다. 아이에게 공지를 읽어주고 지원해 보겠냐고 했더니 "저는 영재가 아닌데요?"
라고 합니다.
저는 아이에게 영재학급이란 사교육에서나 할 수 있는 해당분야의 심화 교육을 공교육으로 제공받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어차피 선발과정을 거치니 지원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고요. 아이는 들어보더니 좋다고 합니다.
GED 시스템이라는 인터넷 사이트에 인적사항을 등록하고 자기소개서를 써서 원서 접수를 합니다. 선생님도 GED에 접속해서 학생을 추천해야 합니다. 담임 선생님께 추천서를 부탁드렸습니다. 12월 초에 A 예고에 가서 주어진 주제에 따라 운문 또는 2000자 분량의 산문을 씁니다. 면접을 보고 한 달 후 합격자 발표합니다.
그동안 각종 영재학급은 저희 아이와 전혀 관계없는 일이었는데, 갑자기 영재 원서 접수를 하려니 웃음이 나옵니다. 수학, 과학 영재학급 지원을 위해 방학 내내 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남의 집 아이들을 보며 참 신기했는데 말이지요.
영재학급 합격여부를 떠나서, 동기부여가 되는 기회 같아 저는 참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본인이 흥미를 느끼는 분야 위주로 공부하는 아이의 삶은 늘들쑥날쑥이거든요. 어느 정도 주어진 틀에 들어가 보는 경험도 저희 아이에게는 꼭 필요합니다.
아이는 지난주부터 문예창작과에 재학 중인 대학생으로부터 과외를 받기로 했습니다. 이 기회에 차근차근 수업을 받으며 글을 읽고 쓰는 훈련을 하면 참 좋겠습니다. 2시간 동안 줌 수업을 들으며, 독서 감상문 1편과 2000자 소설 2편을 써내고 있습니다. 모든 과정이 신기하고, 재미있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추운 날 시험 보러 먼 곳까지 가야 하니 걱정이 앞서지만, 본인이 좋아서 하는 일이니 엄마도 열심히 뒷받침해 주어야겠지요? 최단 거리를 검색하고, 도로 상황을 시뮬레이션해 봅니다. 저의 임무는 아이를 잘 준비시켜 좋은 컨디션으로 데려다주는 것입니다. 쉬운 것 같아도 정말 어렵습니다. 시험을 보고 오면 또 상황을 보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