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명품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나. 몇백만 원 하는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보다, 차라리 그 돈을 통장에 넣어두고 때때로 보고 있으면 더 뿌듯함을 느끼던 나였다.
덜렁이에 차분하지 못한 성격인데 비싼 가방 들고 다니다가 잃어버리기라도 한다면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아서 미리 예방 차원에서 손에 들고 다니는 물건들은 웬만하면 고가제품을 사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핸드폰도 저가 모델만 사 왔다.
결혼 16년 차. 어느덧 중년의 나이가 되어 각종 행사와 모임이 많아지는 나이가 되었다. 행사에 참여하려고 보니 들고 갈 가방이 없다. 데일리 백으로 들고 다니는 가방도 집에서 키우는 앵무새가 가방 모서리를 뜯어 놓았다. 출근할 때 편하게 들고 다니던 가방은 결혼식장이나 행사에 들고 가기에는 드레스 코드가 맞지 않는다.
필웨이/여성 가방 순위
결혼 생활 16년 동안 내 돈으로 명품 가방을 산 적이 한 번도 없으니, 이번에 한 번 장만해 볼까 하는 마음이 생긴다. 맞벌이하며 삼시세끼 집밥만 해 먹으며 한 달에 한 번 외식을 할까 말까 빡세게 돈을 아껴왔으니, 이 정도는 한 번 질러봐도 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스스로 다독인다.
모임에서 친구나 동기들을 만나면 들고 오는 가방을 보고 서로 부러워하기도 하고, 이야기소재로 삼기도 했는데 그동안 관심이 없어서 심드렁했었다.
심부재언(心不在焉)이면 시이불견(視而不見)청이불문(聽而不聞)이라고 했다. 마음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법이다. 가방을 보고 부러워하는 마음도 뭘 알아야 생기지. 가방이란 정의를 부담 없이 들고 다닐 수 있는 가벼운 재질이면 최고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 비싼 가방은 보아도 보이지 않는 그런 물건이었다. 그런 아내가 명품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아니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그런 나이가 되었다.
가방을 사려고 마음먹고 보니 문제는 자린고비 남편의 동의였다. 내가 번 돈으로 내가 산다는데 무슨 문제가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명색에 부부인데 큰 지출이 있을 때는 서로 동의하에 지출하는 것이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이왕이면 남편이 함께 쇼핑해 주면 더 좋겠다는 불가능에 가까운 희망 사항도 생겼다. 그래서 남편에게 고민 끝에 한 마디 던졌다.
"여보, 나 가방 필요해. 보너스 나오면 명품 가방 하나 살게."
말을 던져 놓고선 남편의 안색을 살펴본다.남편은 의외로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어, 그래. 하나 사."
오잉? 정말? 이럴 사람이 아닌데? 웬일이지? 계속 물음표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옆에 앉아서 대화를 듣고 있던 아들이 엄마에게 와서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엄마, 아빠 명품 가방도 1+1 찾고 있는 거 아냐?" (남편의 1+1 집착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엄마와 아들이 서로 가방을 주제로 속닥거렸다. 아들도 아빠의 반응이 의외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엄마의 도발적인 말이 실현될지 안 될지 아들도 궁금해한다.
남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아내를 생각하는 마음은 있으나 가방 사는데 큰돈은 지출할 생각이 없고,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짜낸 묘수가 본인 누나에게 졸라서 구찌 가방 하나를 뺏듯이 얻어와 아내에게 선물로 준 전적이 있는 그런 남편이다. 어떻게 누나 가방을 뺏어와 선물로 줄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전략이 남다른 남편이다. 형님은 무슨 죄로 멀쩡한 가방 하나를 뺏기고, 아내는 무슨 죄로 생애 최초 명품 가방을 남편이 아닌 형님에게 받는단 말인가.
두 여자의 희생으로 남편은 실리와 명분을 모두 얻었다. 돈 한 푼 쓰지 않으면서 아내에게 명품 가방을 선물해 줬다는 타이틀을 얻었다. 누구를 위한 선물인지 모르겠다. 남편 혼자 윈윈 했다. 10년 전 일이지만 그때는 명품에 관심이 1도 없었던 터라 남편이 아내를 생각해 주는 마음을 더 기특하게 여겼다.
이제는 세월이 지나 아내도 명품에 눈길이 가고 있으니, 마음이 아니라 물질로 아내에게 보은 할 기회가 남편에게 찾아왔다.
남편! 아내가 명품에 눈을 떴어.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말고 아내에게 점수를 따란 말이야!
남편은 가방 가격이 얼마라고 생각하고 흔쾌히 허락해 준 지는 몰라도 살은 쏘고 주워도 말은 하고 못 줍는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꼭 가방을 얻어내고 말 테다. 이왕 사는 거 남편이 흔쾌히 본인 카드로 긁어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