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나 행사 때 친척들이 모이면 또래 아이들끼리 즐겁게 놀게 된다. 요즘은 밖에서 뛰어놀기보다 핸드폰으로 각자 영상을 보거나 게임을 하는 행위가 기본값이 되었다. 우리 어릴 때와는 사뭇 다른 광경이다. 친척들이 모이면 짧은 인사와 근황에 대해 물어본 후 핸드폰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 인터넷 세계를 유영한다. 오프라인보다 온라인 접속 시간이 더 길어진 삶이 자연스러워졌다.
추석 때 친척 집을 방문하면 둥이들과 동갑이거나 또래인 나이의 아이들이 꽤 있다. 옛날 같았으면 떠드느라 시끌벅적 정신없을 텐데 아이들이 모두 없는 듯 조용하다. 이유는! 핸드폰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어서 어른들이 용돈을 쥐여주며 밖으로 쫓아냈었다. 나이가 가장 많은 조카가 진두지휘해 동생들을 소 몰듯이 몰고 나가 놀이터에서 놀았다. 놀다가 지겨워지면 용돈으로 맛있는 것도 사 먹고 충분히 시간을 보내고 오는 것이 맏이의 역할이었다. 일찍 들어오면 왜 이렇게 일찍 오냐며 혼나던 때도 있었다. 아이들이 나가면 그제야 어른들은 조용한 분위기에서 오손도손 이야기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아이들은 컸고 손에는 스마트 폰이 생겼다. 이제는 밖으로 쫓아낼 필요가 없을 만큼 조용해졌다. 차분한 공기가 좋지만 반갑지는 않다. 애들이 떠드는 소리, 웃는 소리마저 스마트 폰이 삼켜버린 느낌이다.
둥이들은 핸드폰이 없으니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조금 컸다고 어른들이 말하는 이야기 소재에 끼어들어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도 한다. 그렇게 심심한 듯 놀고 있던 아이가 엄마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한 마디 던진다.
"엄마, 이제 다했어? 고생했어요. 엄마도 쉬어요"
그렇다. 아들은 엄마가 주방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이 끝나 마무리되는 순간에 다가와 고생했다며 한 마디 건넨 것이다.
순간, 마음이 찌릿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느낌. 경험해 보지 못한 감정이다. 아들은 엄마가 일하는 동안 계속 예의주시하며 엄마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곳마다 시선을 두었던 것이다. 다른 아이들은 핸드폰 보고 게임하고 있었을 시간에 엄마를 바라봐 준 아들. 이런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언어의 한계라는 게 이런 걸까.
옛말에 '논 팔고 소 팔아서 공부시키면 불효자 되고, 남의 집 머슴살이시킨 아들은 효자 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의미가 이 상황에서 이해가 되었다.
남들이 보면 다 사주는 핸드폰도 안 사주는 부모에게 불만이 많아야 할 상황인데 아들은 오히려 효자가 되어간다. 원하는 물건을 쉽게 사주지 않고 사서 고생시켜서 그런가. 아니면 부모가 사줄 수 있는 상황이지만 본인들을 위해 안 사준다는 사실을 이해할 나이가 되어서일까. 엄마를 지그시 바라봐주는 아들이 있다는 이 상황이 그저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