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프란츠>를 보고

진실과 거짓의 경계 이야기

by 고양이맘마




frantz.jpg 이미지 출처 : Google




아이러니하게도, 거짓에는 색이 있다. 진실은 오히려 흑백인 작품. 바로 이 영화이다. 아드리앵의 거짓 감정, 거짓 이야기, 어느 환상, 그리고 안나의 거짓말까지. 모두 영화 속에서 몇 안 되는 컬러 장면들이다. 프란츠에 잠식된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프란츠로 살아간다. 안나의 사랑은 참으로 컸나보다. 어쩌면 그 부모보다 더 큰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약혼자를 잃고 난 마음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그것도 전쟁으로. 아들을 나라를 위한 일이라며 전쟁터로 보낸 부모. 안나라면 얼마나 원망스러울까. 하지만 그는 약혼자 프란츠를 전쟁터로 내몬 부모와 함께 산다. 심지어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삶을 건 거짓말까지 한다. 어쩌면 어느 순간, 프란츠의 부모는 안나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들이 가지지 못한 행복을 안나에게라도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 ‘행복’이 억지임을 외면한 채 말이다.

영화의 중후반부 이후, 아드리앵은 생각보다 찌질했다. 특히 마지막에 덧붙인 ‘엄마가 파니와 결혼하길 원해’ 따위의 대사가 아주 빛을 발했다. 프란츠라는 한 아름다운 사람에 대한 기억에 거짓이 입혀진 것도 서러운데. 오죽하면 파니가 불쌍하다는 생각까지 했다. 여담이지만, 그 또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드리앵과 안나의 관계가 그저 친구 사이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파니는 안나에게 드레스를 빌려준다. 아드리앵을 쉽사리 보낸다. 그런 남자를 사랑하는 가슴은 얼마나 비참하고도 우울할까.


오종은 영화를 통해 진실과 거짓, 용서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프란츠의 죽음에 잠식된 사람들을 극의 전면에 내세운다. 막상 프란츠는 등장도 거의 하지 않는다. 프란츠의 부모, 안나, 그리고 아드리앵. 하지만 이들 중 진심으로 프란츠를 추모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들의 슬픔과 자책에 빠진 부모. 그 부모의 뜻대로 삶을 멋진 척 살아가려는 안나. 그들에게 ‘자신의 마음이 편하기 위해’ 용서를 구하고자 하는 아드리앵. 가장 기억에 가까운 삶을 살려는 게 그나마 안나이다. 그는 독일 사람은 강하고 당당하다는 편견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군다. 안나는 자살하려다 회복된 몸을 겨우 추슬러 파리로 향한다. 아드리앵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파리는 어땠나. 안나는 프란츠의 부모에게 편지를 보낸다. 프란츠가 기억하던 파리는 전쟁 전이었다고. 겨우겨우 시골 마을까지 달려가 아드리앵을 만난 그는 마네의 그림을 마주하게 된다. 루브르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잔인한 방식으로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에도 그는 마네의 <자살>을 본다. 그리고 거기에서 가장 큰 삶의 의욕을 얻는다. 마치 이 영화가 흑백과 색깔의 사이를 넘나드는 경계만큼이나 아이러니하다. 마지막 안나의 모습은 쓸쓸함을 넘어 어딘가 비장하고 무섭기까지 하다. 내내 안나의 감정에 이입하던 나는,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으로서 영화를 비집고 나온다. 그리고 안나의 행복을 빌게 된다. 차라리 저 그림 앞에 앉아있는 낯선 이와 안나가 사랑에 빠지게 되길 바란다. 거짓말쟁이 아드리앵과 지저분한 크로이츠 때문에 충분히 상처받고 실망했음을 알면서도. 프란츠의 부모 때문에 억지로 결혼 이야기를 꺼냈음을 알면서도. 거짓으로 편지를 보내어 행복한 척 함을 알면서도. 나 또한 어쩔 수 없는 하나의 방관자일 뿐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울적해졌다. 안나 자신은 아마 누구도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애초부터 프란츠를 추모하며 적당히 한 집안의 딸처럼 숨어 살아가길 바랐을 것이다. 책을 읽고 피아노를 연주하며 그저 그렇게. 그 또한 하나의 행복이 될 수 있을 텐데. 갑자기 내용 내내 아드리앵을 원망하던 내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이후의 안나는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까. 내가 안나였다면. 아드리앵이 그렇게 마네의 그림처럼 죽어버렸다 생각할 것이다. 그의 용서는 배신당했다. 빛이 바래버렸다. 한 사람의 소심함 때문에. 사실 안나는 처음부터 아드리앵을 사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프란츠를 추모하며, 같이 파티에 가며, 떳떳하고 치졸하지 않은 인격을 존중하며. 그렇게 관계를 이어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채 용서하지 못한 마음에도 그에 대해 거짓말을 해 주었으리라 믿는다. 신부를 찾아가 고해성사를 할 정도로 마음이 고통스러웠던 안나. 그가 죽은 줄 알고 곧장 눈물을 쏟아버린 사람. 사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아드리앵을 미워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후에도 평생 그렇게 증오 없이 살아가지 않을까. 죽은 프란츠를 추모하되 그리워하지 않으며, 실망스러운 아드리앵을 무시하되 잊지 않으며. 행복해지기 위해 크게 노력하지도, 안주하지도 않으며. 그는 있는 자체로 충분히 자연스러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만일 프란츠의 부모가 아드리앵의 말이 모두 거짓임을 알게 되었다면 어땠을까. 모든 것은 무너졌을 것이다. 영화의 초반부에 나왔던, 한스의 냉정한 태도와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드리앵의 거짓으로 인해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 당당하고 올바른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모두, 아들들의 죽음에 축배를 드는 아버지들이라고. 참으로 슬프고 아픈 역사가 아닐 수 없다. 고집 세고 표정 굳은 전형적인 아버지 상이었던 한스가 그리도 많이 변화하다니. 치유의 힘은 정말로 세다. 신부가 안나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 거짓의 의도가 선했으니 결과 또한 그랬을 것이다. 물론 결과적으로 아드리앵의 거짓은 개인의 욕심일 뿐이어서 안나가 상처를 받았지만 말이다.


처음 <프란츠>를 보았을 때는 막장 아침 드라마와 같은 극렬한 전개에 충격을 받았었다. 하지만 두 번 보고 세 번 보니, 처음에 내가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 하나 둘 보이더라. 아드리앵의 진실, 안나의 거짓, 용서, 그리고 등장인물 모두의 사랑. 특히나 흑백과 색깔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구분 짓는 오종의 표현법. 이 때문에 영화가 더 돋보였다. 영화를 검색해보니 혹자는 이 영화가 이해할 수 없어 보는 것 자체로 시간낭비라고 했다. 당신에게 묻고 싶다.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있다면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없을 리가 없다. 용서로부터 배신당한 적이 있는가? 있다면 더더욱 영화를 잘 이해할 수 있을 텐데. 거만하다고 말해도 좋다. <프란츠>를 이해하지 못하는 당신의 삶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말을 횡설수설한 것 같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영화 속 감정선 역시 뒤죽박죽이기 때문이다. 안나는 아드리앵의 집에서 마네의 <자살>을 발견하기 전까지 감정을 확실히 알지 못한다. 좋아한 것일까, 그리워한 것일까, 프란츠를 투영한 것일까. 제목의 ‘프란츠’는 분명 그저 사람 이름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주요 등장인물 네 사람의 삶을 엮은, 안나의 결정을 송두리째 뒤집은, 아드리앵의 치졸함을 확인한, 하나의 사건명과도 같다. 망자를 둘러싼 사랑과 용서, 배신, 그리고 진실과 결정에 대한 하나의 이름. 프란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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