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봄날은 간다>를 보고

우리 모두의 봄날을 보내며

by 고양이맘마




tumblr_mqr1vwVWdZ1sxf1p3o8_500.jpg 이미지 출처 : Google




그저 슬픈 사랑 이야기라기엔 무언가 더 있다. 찬란하리만치 아름다웠던 상우와 은수의 이야기. 쏴, 쏴, 하는 바람의 소리처럼 참 힘 있는 이야기. 소화기 사용법 알아요, 라는 질문으로 움트는 감정들. 물론 영화 자체는 조금 문제가 있다. 상우의 행동이라던가 은수의 반응이라던가. 도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물의를 일으킬 법한 내용이다. 나 또한 이들의 방식에 동의할 수 없다. 비판하고자 하는 부분이 산더미이다. 표현도 대사도 썩 세련되지 못했다. 별로 대단치 않은 작품임에도 우리는 왜 열광할까. 감독은 순수했다. 조금의 가감도 없이, 찰나의 감정, 그에 당당하게 맞섰기 때문일 듯하다.


은수가 소화기 사용법 알아요, 라며 상우가 아닌 다른 남자에게 말을 건넸을 때. 내 마음도 철렁 내려앉았다. 언젠가 대밭에서의 추억처럼 휘 불면 날아갈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감안해도 그는 너무 멀리 가버렸다. 사랑스러운 감정들을 쉬이 보내버렸다. 벚꽃이 흐드러지던 길에서 상우는 가만히 서 있었다. 둘은 눈도 마주쳤고, 마음도 동했고, 손도 움찔거렸다. 하지만 가만히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은수와 상우가 행복하길 바랐지만 동시에 둘이 달려가지 않길 바랐다. 그렇게 둘은 서로를 지나갔다. 봄날은 갔다.

누구나 사랑을 해 보았을 것이다. 영화를 보며 공감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숱한 명대사 명장면을 남긴 영화. 요상하고 아쉬움도 많은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감성이 참 묘한 영화. 이 영화를 처음 보았지만, 동시에 신기하게도 나는 많은 장면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또래 애들보다 좀 되바라진 내 자신은 우습게도 영화가 익숙했다. 은수와 상우를 이미 만나서 그럴까. 혹은 일련의 과정들이 다 내게 몇 번 반복된 역사이기 때문일까. 알 수 없다.


라면 먹을래요? 그 언젠가 배시시 웃으며 장난치던 F의 말. 분명 이 영화를 따라한 거겠지. 알면서도 나는 그와 같이 라면을 먹었다. 이어지는 자고 갈래요, 는 거절했지만. 그와는 참 아프고도 질질 끄는 사랑을 했었다. F를 만나며 사랑이 모종의 게임 같을 수도 있구나 하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이제껏 만나온 남자들 중 가장 짜릿하고 가장 감정에 충실했던 만남이 아니었을까.

그냥. 끝나간다고! 내게 빙빙 돌려 말하던 C의 말. 알고 보니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었다. 심지어 그 상대 여자는 내가 C 여자 친구인 줄도 모른 채. 그는 학교생활이 끝나가고 있었다. 나는 졸업을 하면 네가 한국에 돌아와 나를 안아줄 줄 알았다. 하지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누가 그랬지. 사실이더라. 살면서 누군가를 가장 짧게 좋아했던 기억이다. 당시에는 자존심 부린다고 내가 먼저 이별을 통보했었다. 하지만 또 바보같이 억울하게 자기 전 이불 속에서 눈물을 흘렸더랬다.

더 친해지면 해요. 나에게 덤비던 E에게 내가 건넨 말이었다. 얼마 친하지도 않은데 벌써부터 깊은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동시에 그가 좋기도 했지만. 순순히 거리를 두어주던 E는 어느 날 내게 자신의 마음을 장난처럼 털어놓았다. 친절한 미소는 덤이었다. 이상하게도 좋다가 또 부담스러웠던 그와는 관계가 애매하게 끝나버렸다. 좀 더 친하게 지낼 수 있으면 좋았을까. 아직도 확신이 없는 사람. 아직도 모르겠는 관계. 그냥 이대로 끝나버린 것이 최선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잘할게. 나를 붙잡던 B의 말. 참 냉정하게도 나는 군대에 있는 그를, 심지어 전역도 얼마 남지 않았던 사람을. 살면서 가장 오래 만났던 연인을 내쳐버렸다. 아마 그처럼 착한 이는 내 인생에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은 게 흠이지만. 우습게도. 나 참 나빴다. 하지만 그가 잘하는 것과 별개로 내 마음이 떠나 있었다. 싫지도 않았다. 그저 당신이 행복하기만을 바랐다. 나를 떠나서.

사귀는 사람 있으면 데리고 오래, 아버지가. 비슷한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G의 아버지와 G와 나는 셋이 동그란 테이블에 둘러앉아 고기를 먹었다. 호구조사 비슷한 걸 당했었다. 상당히 구체적으로 물어보셨지만 동시에 불쾌하지 않았던 신기한 기억. 나는 내가 G와 결혼할 줄 알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님과 마주앉아 식사를 한 게 처음이었다. 나를 참 예뻐해 주시던 그의 부모님. 내가 어린 마음에 실수도 다양하게 했지만 모두 눈감아 주셨던 좋은 분들이었다. 부모님을 닮아 착했던 G 또한 종종 생각이 난다.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당시의 좋았던 기억들이 가끔 나를 미소 짓게 한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A의 원망 섞인 목소리. 그 어린 나이에 A는 이 영화를 관람했던 걸까. 나는 사랑했던 사실을 확신했지만 동시에 헤어짐이 필요하다고 여겼었다. 그는 참 한결같았다. 아주 어릴 때, 남들이 들으면 그게 연애냐며 비웃을 나이에 만났던 사람. 하지만 그 감정까지 어렸다고 할 수 있을까. 십 년이 넘게 지난 뒤에도 내게 다시 사랑을 이야기한 A. 그의 한결같음이 마치 상우 같았다. 가장 순수하고 가장 오롯이 나를 봐주었던 착한 이. 이제는 연락이 끊겼지만 차라리 마음 한 구석이 편하다. 그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술 마시면 네가 나 보고 싶어 할 것 같아. D는 술을 너무 사랑했다. 나랑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도 소주를 혼자 두 병인가 세 병인가를 마셨었다. 술을 마시지 않는 나로서는 부담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래도 나는 너무 오랜만에 찾아온 마음이기에 그를 놓치지 않으려 부지런히 애썼다. 하지만 떠날 사람은 떠나고 말더라. 나를 떠나면서도 좋아한다고 말하던 그의 입술을 생각하면. 마음이 많이 아팠다. 헤어진 뒤에도 몇 달에 한 번씩 전화가 걸려와 술에 취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 또한 정말 많이 울었었다. 하지만 다시 돌이켜보면, 헤어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술을 안 마시는 나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D였다.

내가 라면으로 보여? 어제도 이 대사를 외친 H. 영화를 함께 보는데 공교롭게도 우리는 김치찌개에 라면사리를 넣어 끓여먹고 있었다. 날이 추워서 난방텐트 바깥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물 좀 떠 와라, 딸기 청 좀 탄산수에 타 와라, 밥에 치즈 얹어 와라 등등. 한 끼에도 참 시켜먹은 일이 많은 이기적인 나 자신. 사랑하는 H는 군말 없이 모두 해 주었다. 마침 상우가 은수에게 은수 씨, 내가 라면으로 보여? 라고 외쳤을 때 나는 깔깔 웃어버렸다. 영화를 멈추고 남편이 내게 짐짓 화난 척하며 외쳤다. 맘마 씨, 내가 라면으로 보여?


나는 참 여러 봄날들을 보내며 살아왔다. 모든 관계에는 어울리는 소리들이 각각 있었다. 대나무밭, 바다, 절간, 개울가, 갈대밭 등등. 상우는 은수와 헤어진 뒤에도 여전히 소리를 듣는다. 마지막 상우의 표정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은수를 잡지 않고도 후회하지 않는 상우. 사랑은 소리 있게 찾아와 마치 차에 긁힌 자국과 같은 상처를 남긴다. 그리고 마지막엔, 또 다시 소리 내며 도망간다. 가장 고요하고도 부산한 어느 봄날처럼, 갈대밭처럼, 그게 그렇다. 사랑이라는 게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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