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툴리>를 보고

'좋은 엄마'에 대하여

by 고양이맘마



이미지 출처 : Google



영화의 삼분의 일 쯤 되는 지점에서 재생을 잠시 멈추었다. 펑펑 울었다. 장애가 감당되지 않는 아들, 아이를 갓 낳아 덜 회복된 말로, 그리고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끝없이 울어 제끼는 갓난 막내. 영화는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나는 영화가 한참 진행될 때까지도 말로가 샤를리즈 테론일 거라고 상상조차 못했다. 그저 어느 순간, 맥이 빠진 얼굴을 보다가 문득 배우의 얼굴이 생각났을 뿐이었다. 샤를리즈 테론을 마지막으로 본 영화는 <롱 샷>이었기 때문일까. 영화는 너무 현실적이어서 잔인하다. 기득권이 관심 갖지 않는 현실은 이만큼이나 잔인하다.


미국판 <82년생 김지영> 같다는 생각을 했다. 김지영은 사회에 좀 더 초점을 맞춘 영화이고, 툴리는 말로라는 개인을 더 이야기하고 싶었던 듯하다. 하지만 슬픈 점은 하나이다. 국가가 어디든 엄마의 신세는 비슷하다. 온전히 ‘엄마’로서만 살기를 자처한다면 운명은 하나뿐이다. 나를 잃어가는 결말. 툴리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이야기하는 말로가 너무 가슴 아팠다. 결말도 놀랍지 않을 정도였다. 중요한 사실을 선택하기 이전에 내가 항상 하는 생각 중의 하나. ‘미래의 내가 이 모습을 보았을 때, 후회하지 않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말로는 과거의 툴리로부터 동정받고 보호받는다. 그리고 무너지고 만다.

더 이상 출산과 육아는 성스러운 행위가 아니다. 사람들은 과거의 이야기를 들먹이며 이같은 사고가 얼마나 경박한지 증명하려 한다. 하지만 그들은 틀렸다. 다른 것도 아니고 틀렸다. 당신들이 믿는 자본이 출산, 육아, 살림을 가치 없고 하찮은 일로 치부해 버렸다. 남녀에게 임금 격차를 주고, 아이를 낳아 키우기 위해 결국 남편은 자본 전선에 뛰어 들고, 사회적 약자인 아내는 돈을 벌기보다 아이를 키우게 선택되고. 이런 이야기를 하면 많은 기득권들이 되레 소리를 친다. 남편은 생활을 위해 애쓰지 않냐고. 결혼하지 않았다면 일을 하지 않았을 거였나?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회사에서 상사의 부당한 쓴소리를 참지 않았을 거였나? 어차피 당신 스스로의 생계를 위해 할 일이 아니었나? 고생을 안 한다는 뜻이 아니라, 경제적 효율을 위해 불가피하게 남편이 나간 것뿐이라는 말이다. 동일업무 대비 여성 임금이 더 높았다면 당연히 아내가 나갔을 거면서. 회식도, 동료들과의 모임도, 모두 업무의 연장선상이라 힘든데 너는 왜 이해를 못 해주냐는 대사도 아내가 꺼냈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 사촌언니는 작년 호주에서 결혼했다. 언니가 생활비를 대고 남편인 톰이 집안일을 한다. 톰은 이에 대해 한 번도 불평을 하거나 생색을 낸 적이 없다. 톰이 대단한 남편이 아니고, 우리 언니가 특출난 아내도 아니다. 그저 역할을 그렇게 분담했을 뿐이다. 영화 속 말로의 남편 또한 그렇다. 말로는 계속 이야기한다. 내 남편 좋은 아빠라고. 그렇다면, 좋은 엄마는 어떠한 상의 사람일까. 아이를 잘 키워내고 가정 살림을 잘 꾸려 남편을 묵묵히 서포트 하는 인물? 말로는 그렇지 않은가? 왜 아무도 말로에게는 좋은 엄마라고 말하지 않는 반면, 밤마다 게임으로나마 자기 시간을 찾는 남편은 좋은 아빠라고 생각해줄까. 이 처우의 기준부터 잘못되었다.


말로가 툴리로부터 받은 도움들은 사실 어렵지 않았다. 자녀의 숙제를 봐주고 잠깐 놀아주는 것에서 끝이 아니다. 남편이 좀비 게임을 할 동안 툴리는 오랫동안 지저분했던 바닥을 닦고, 아들을 위한 컵케이크를 굽고, 부부의 성적 관계를 원활하도록 돕고, 샹그리아를 만들고, 말로에게 대화와 잠을 선사한다. 비록 그것이 거짓일지라도. 이 일들에서 과연 남편이 할 수 없이 대단히 어려운 일이 있나? 내 대답은 당연히 아니, 다. 물론 말로는 야간보모를 부를 수 있었다. 하지만 오빠로부터 경제적으로 눈치를 보는 입장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밤새 아이를 맡긴다는 선택은 여러모로 찝찝했을 것이다. 남편이 조금만 도와줬더라면 툴리는 등장할 필요조차 없었을 텐데. 슬프지 않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질문을 달리 해 보고 싶다. 왜 남편들은 아내의 살림과 육아를 돕는가? 자신들이 주체로서 참여할 수는 없는가?

김지영이나 말로의 남편은 모두 ‘착했다’. 조금 무신경한 부분들도 있었지만 도를 넘지 않았다. 언제나 아이들에게 관심이 있었고, 아내를 위해 감정을 소모하고, 가정의 일을 돕는 ‘착한 남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내가 정신이 분열될 동안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집에 와서는 쉬는 시간을 갖고, 가끔은 아이들이 뒷전이어도 괜찮은 선택지를 쥐고 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착하고 다정한 가장이라 칭찬받았다. 하지만 김지영과 말로는 어떠한가. 이들은 당연하게 모든 일을 제 운명이라 순응하고 받아들였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는 감정들을 모두 철저히 죽인 채. 밝고 환한 모습만 보여야 ‘나쁜 도우미’로서 칭함 당하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안타까운 존재들. 우리 엄마.


김지영의 결말보다 말로의 결말은 더 슬프다. 김지영은 최소한, 남편이 육아휴직을 얻고 정신병을 치료하여 커리어를 다시 쌓는다. 하지만 말로는? 여전히 집에서 도시락을 만든다. 남편과 함께 만들기는 하지만, 글쎄, 그것이 과연 말로의 온전한 치유를 의미하기는 할까. 육아는 현실이고 전쟁이다. 흔히 들어서 다들 감흥이 없다 느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부상자는 늘 아내이다. 말로는 전쟁 후유증을 치료받지 못했다. 생활 전선에 치여서 묵묵히 다시금, 기계 같은 삶을 살아간다. 영화는 이 잔혹한 생태를 너무 현실적으로 드러냈다. 남편은 뒤늦게야 참여한다. 늘 그렇다. 아이를 잘 돌봐주고 집안일을 도와주는 사람이 좋은 남편이 아니다. 내 아내가 나에게 그러하듯 그를 보살펴주는 사람. 감정을 신경써주고 사랑과 지속적인 관심으로 서로를 보듬을 수 있게 해주는 사람. 이것이 진정한 좋은 남편 아닐까.


영화를 다 보고서도 또 울었다.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말로의 잠수 씬. 의미가 무엇인가 생각할 때마다 내 숨이 다 턱 막힌다. 물에 갇혀 어느 날엔가 아이에게 들었던 인어를 만나는 말로. 여기에서부터 알고 있었다. 툴리는 말로의 간절한 바람이구나. 너무나도 슬펐던 나는 이때부터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던 듯하다.

우리 엄마는 아직도 나를 동생을 아빠를 놓지 못한다. 습관적이다. 자신의 삶이 없다. 회사를 다니고 커리어를 쌓는데도 그렇다. 이것이 사회의 당연한 관습이라 여기고 순응한다. 엄마가 제발 엄마의 삶을 가졌으면 좋겠다. 우리가 엄마 인생의 전부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 얼마나 잔혹하고 잔인한 운명인가. 나는 이러한 엄마가 되고 싶지 않다. 내 삶을 모두 걸고 싶지는 않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보면, 결국 결론은 하나다. 나는 엄마가 되고 싶지 않다. 안타깝게도 사회는 김지영과 말로를 통해 우리가 엄마가 되지 못하게 한다. 다시 생각해도 나는 엄마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친구의 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