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하는 중
7년 전인가. 노란 색연필로 줄 그은 흔적이 있는 걸 보아. 흔적은 시간을 가늠하게 한다. 노란 색연필을 즐겨 쓰던 시기는 2014년도다. 흔적은 책 속 밑줄로만 남았고 내 기억 어디에도 없다. 함께 읽기로 정한 이후 서가에 꽂힌 책이 있다는 걸 알고 좋아했었을 뿐 내가 저 책을 읽었으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책장을 넘기는 내 당혹스러움을 저자가 위로한다. 그런 자리에서 문학이 태어나는 거라고.
문학으로 대변되는 소설을 주야장천 읽어대던 시기가 있었다. 첫 기억은 야반도주하듯 대구에서 영천으로 이사를 갔던 아홉 살 때다. 낯선 곳에서 지내야 하던 우리 자매에게 엄마는 계몽사에서 발간한 세계문학 전집을 구입해주었다. 한국 단편과 함께 구입하면 책장을 서비스로 준다는 방문판매원의 마케팅에 엄마는 그 당시 우리집 형편에 어울리지 않는 거금을 들여 유일한 가재도구가 되는 책장을 방에다 떡하니 들였다.
아홉 살 열한 살 두 딸에게 세계문학전집, 한국 단편소설전집, 왕비 열전이라니. 어린 두 자매에게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책이었으나 엄마에게는 다른 계획이 있었을 테다. 가까이 살고 있는 작은외삼촌집에 가면 눈높이에 맞는 동화책들이 있었으니 그보다 레벨 업한 책을 장만하지 않았을까.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그 시기에 엄마는 무슨 맘으로 책을 사들였을까. 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이 세월이 흐를수록 쌓인다.
두 번째 기억은 열아홉 가을부터 스물다섯까지 이어진다. 유일한 ‘주체적 활동’으로 기억한다. 정해진 일과를 수행하면서 틈만 나면 읽어댔던 시간이다. 버스 타고 오가는 동안에도, 점심시간 혹은 확보할 수 있는 모든 시간에 내 손에는 책이 있었다. 큐레이션 감각은 고사하고 어느 누가 추천하는 책도 없던 시절 매일 어떤 책을 읽을지 고민하다 낱권 구입하는 것이 힘들어, 대개 10권 혹은 6권 구성인 대하소설을 읽었고 해마다 발간되는 온갖 문학 수상집을 죄다 읽었다.
그토록 열심히 꾸준히 읽을 수 있었던 까닭은 우선은 재미였다. 현실의 힘듦을 잊게 하는 확실한 매개체인 책으로 만나는 세상이 재미있었고 그 세상 안에서 나는 남루하지 않았다. 고상한 쾌감을 느꼈고, 그 쾌감은 진지했다. “하나의 문학 작품이 성공적으로 기능을 수행할 때, 쾌감과 효용성이라는 두 가지 특징들은 단순히 공존할 뿐만 아니라 혼합해 있어야 할 것이다. 문학의 쾌감은 있을 법한 쾌감들의 긴 목록 중의 한 가지 선택이 아니라 더욱 고상한 종류의 활동, 이를테면 비소유의 명상에서의 쾌감이기 때문에 <더욱 고상한 쾌감>이라고 우리는 주장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문학의 효용성은 <쾌감을 주는 진지함>이다. 다시 말해서 행해져야 하는 의무나 배워야 할 교훈의 진지함이 아니라 미학적 진지함이며 인식의 진지함이다”는 르네 웰렉의 글은 내 생각을 고스란히 옮겨 써놓은 듯하다.
문학이란 사상이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한 예술. 또는 그런 작품. 시, 소설, 희곡, 수필, 평론 따위를 일컫는다고 사전에서 정의한다. 르네 웰렉은 <문학의 이해>에서 “예술로서의 문학 작품은 하나의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다양한 의미들과 관계들을 지닌 하나의 성층화 된 특성으로 이루어진 고도로 복잡한 조직화라는 결과가 나타나야 한다.”라고 했다. ‘사상과 감정’, ‘다양한 의미와 관계’를 저자는 스물여섯 개의 키워드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나 한 가지 의식이 관통한다. 문학은 회복하는 힘이 있다는 것.
“연대감이 끊어지고 소속감이 깨지며 혼자 남는 순간 자신과 세상은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는 어느 날 불쑥 나타난 자신을 앞에 두고 속삭이듯 말을 건넨다. 성큼 내 앞을 가로막아 선 세상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문학이란 그때 자신에게 속삭인 말씀이고, 세상이 들려준 이야기이다.” 문학을 탐닉했던 세 번째 기억을 보여주는 문장이다. 만사가 귀찮을 때 나 자신도 팽개쳐버리고 싶은 그 순간에도 책은 읽었는데 그때는 문학밖에는 읽을 수가 없다.
문학이 우리네 삶의 어떤 지점에서 태어나고 그것이 보통 사람들을 어떻게 달래줄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겠다는 작가의 의도대로 이 책을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생각이 이어졌다. 문학으로부터 나는 어떻게 위로를 받았는가. 상처 받은 영혼을 문학으로 위안을 받았고, 힘든 일상을 문학으로 휴식처를 삼았으며, 모순되는 현실에서 때로 통찰을 발견하는 지혜를 만나기도 했다. 맹목적으로 읽어댄 문학으로 나의 상당 부분이 만들어졌음을 부인할 수 없다. 누구도 배달해주지 않았지만 문학은, 내게 일점 향기가 되었다.
“나에게는 어떤 불안증 같은 것이 있다. 어렸을 때 기분이 안 좋으면 글을 쓰곤 했는데 그러면 기분이 좋아졌다. 나에게 글을 쓰는 것은 무엇인가를 먹는 것과 같은 것이다. 불안감을 넘어서게 하는 치료제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말이 내 말이기도 하다. 쓰는 행위도 읽는 행위도 비슷한 효용성을 지닌 치료제다. “먼 벗에 대한 그리움, 의기투합의 환희, 위로와 격려, 죽은 벗에게 보내는 인사, 우도의 타락에 대한 개탄, 모두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이거나 그 자체가 문학이다.”(191p)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를 꼽아보면 웹 로드를 걷는 우리는 이미 문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