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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주 Aug 19. 2021

현남오빠에게

강현남, 이 개자식아!


결정했다. 가야겠다. 독서모임에 참석하겠느냐는 안내 문자를 받고 책부터 검색했다. 제목이 현남 오빠에게 라니. 7명의 여성 작가가 ‘페미니즘 소설’이란 타이틀로 엮은 책이다. 최근 개봉해서 화제가 된 ‘82년생 김지영’을 쓴 조남주 작가가 쓴 작품 제목이 책 제목이다. 선정된 도서가 덜 매력적이라 하더라도 찾아서 가고 싶은 공간인 숲으로 만든 성벽인데 하물며 페미니즘 소설이라 버젓이 새긴 소설 모음집이라니. 세상은 달라지고 있고 그 흐름에 발 담그고 있는 중이라 마음이 끌렸다. VIP 좌석으로 예매한 <라벨과 스트라빈 키> 발레 공연을 취소하고서라도 가고 싶을 만큼 단박에 결정한 걸 보면 좋아하는 일에 시간과 에너지 주기로 마음먹은 이후 선택과 집중이 한결 덜 무겁다. 공연 티켓은 친구에게 양도했다. 독서모임에 참석하기로 마음먹고서 책을 샀고 함께 읽으면 좋을 책도 찾았다. 책 목록을 보며 뒤적거리듯 서핑하는 순간은 즐겁다. 책 사는 기쁨이 크다.     




수업 마치고 서둘러 출발했다. 퇴근 시간에 맞물려 도로에서 시간 뺏기고 싶지 않다. 책방 거리에 있는 좋아서 하는 카페에서 한 시간 삼십 분은 있을 수 있겠다 생각하고 이미 즐거운데 웬걸. 생각보다 교통 흐름이 원활하지 않아 주어진 시간은 한 시간 남짓이다. 후루룩 읽었던 책을 다시 훑어본다. 책 나눔 하기로 한 소설보다 참고로 읽은 책에 더 많은 시간을 들였다. 밑줄 그어가며 읽고 공들여 초서 했다. 소설이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이론서는 이해를 돕는다. 뭉그적뭉그적 아는 내용을 명징하게 언어로 짚어내는 먼저 공부한 이들의 텍스트는 고맙다. 작품 해설집이 아니라 여성운동 활동가가 쓴 페미니즘 글이라 쉽게 읽혔다. 그렇지 그렇지, 내 말이 내 말이. 공감하면서 읽었고 속은 답답해도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걸 조목조목 말할 수 있게 돕는 책을 만나 다행이다. 소설을 재미있게 읽고 이론서를 유익하게 읽었으니 금상첨화다.     




현남 오빠에게, 당신의 평화, 경년, 모든 것을 제자리에, 이방인, 하르피아이와 축제의 , 화성의 아이 7 이야기  <당신의 평화> 크게 공감했다. “내가 누구한테 말하겠니.”, “누가  얘기를 들어주겠니.”   엄마인 정순이  유진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레퍼토리 서두에 놓이는 말이다. 뜨끔했다. 발화는 다르지만  역시 딸에게 필터링 없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는 처지라 들킨  같은 민망함에 심박수가 빨라진다. 긴장하며 읽어나갔다. “언제나 유진이었다. 정순에게 폭언을 퍼붓고 화풀이하는 할머니에게 불같이 화내며 맞섰던 사람은.”  이야기다. 할머니와 고모에게 입바른 말을 엄마 대신하는 . 사이다와 폭탄 사이라고  스스로 말할 만큼 엄마 입장을 헤아리느라 용기 내는  딸의 몫이다. 말하지 못하는 엄마를  터져하면서. 그러면서 이해도 한다고 한다. 내가 말하면 불쏘시개 넣은 것처럼  크게 발화될 상황을 모르지 않는다고  만큼  깊다.     




“그가 말했던 현명한 아내, 현명한 어머니란 무슨 의미였을까. 참고 참고 또 참는 사람, 남자가 하는 일에 토를 달지 않는 사람, 남자와 아이들에게 궁극의 편안함을 제공하는 사람. 자기 욕구를 헐어 남의 욕구를 채워주는 사람. 자기주장이 없거나 약하므로 갈등을 일으킬 일도 없는 사람... 그가 ‘현명함’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때마다 유진은 거부감을 느꼈다.” 나를 묘사한 문장 같아서 종이를 노려봤다. 자기 욕구를 헐어 남의 욕구를 채워주는 사람. 자기주장이 없거나 약하므로 갈등을 일으킬 일도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나”였”다. 고등학교 새 학기마다 기초생활 조사서 쓸 때 장래희망 란에 딱히 쓸 말이 없어서 ‘현모양처’라고 써넣던, 열일곱부터 꿈이란 게 없었던, 대체 세상에 나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낙담했던, 나를 위한 세상이 있기나 할까 기대치가 1도 없었던, 그러면서 또 직장생활은 열심히 해서 우수사원상을 받던, 그 조직 안에서 구애하던 이를 만나 결혼한, 사람이 나다.     





장손에 외아들인 집 며느리 노릇은 녹록지 않았다. 나 하나 참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은 날더러 시어른께 잘하라고 하고 참고 지내면 좋은 날이 온다고 했다. 좋은 끝은 있다면서. 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나만 참아서, 그 아픔 위에서 다른 이들만 평안을 가져서는 안 되는 거였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만들어지는 평안은 평안이 아니다. 착취일 뿐이다. 며느리라는 이름값의 착취. <당신의 평화>에서 정순은 그렇게 보낸 세월이 억울해서 이제 며느리가 되려고 하는 아들 여자친구에게 어깃장을 놓는다. 그걸 딸 유진이 결사적으로 막는다. 엄마와 딸의 관계에서도 마음에서 지울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고 몰상식이 만들어낸 거리는 좁힐 방법이 없다. 하물며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에서랴.   



  

최선을 다해 익숙한 반복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말하지 않던 익숙함에서 벗어나 내 목소리 내기. 건조한 목소리로 벌어진 상황 객관화시켜 전달하기>를 우선 실천강령으로 삼는다.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기에 부단한 용기를 내야만 한다. “며느리라는 이유로, 아내라는 이유로, 엄마라는 이유로, 딸이라는 이유로 받아 마땅한 고통은 없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괴롭힘 당할 이유 같은 건 없다. 서로에게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스스로 해방될 수 있는 사랑, 그런 사랑이 가능한 세상을 꿈꾼다. 흘릴 필요가 없는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꿈꾼다.” 작가 노트에 쓰인 최은영의 말이다. <쇼코의 미소>를 책방송에서 들을 때부터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 들게 한 작가라 역시, 글 잘 쓰는구나, 작가에 대한 관심이 절로 생겼다. 좋은 글을 만나면 글 쓴 사람이 궁금해지기 마련. 이야기 버무리는 솜씨가 맛깔나다. 시작은 아들 준호의 여자친구 이야기여서 연애 이야기인가 싶다가, 엄마 정순의 이야기로 휘몰아치더니, 딸 유진의 남자친구로 대변되는 좌빨 운동가의 한심한 편견까지 드러낸다.     




3편의 이야기는 생활 속 수기처럼 편안하게 읽히는 이야기다. <현남오빠에게>는 화자인 ‘나’가 현남오빠에게 남기는 편지다. 마지막에 강현남, 이 개자식아!로 끝나는. 사랑이라는 허울로 ‘나’의 인생을 마음대로 계획해버린 남자를 뻥 차 버리는 이야기다. 모서리 접어서 눈앞에 들이밀며 딸에게 꼭, 꼭, 반드시 읽어보라고 권했다. <경년 更年>은 중학교 2학년인 아들이 스트레스 해소라는 명분으로 또래 여학생과 하는 섹스에 대한 무감함에 분노하는 엄마 이야기와 나이 드는 여자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꼼꼼하게 묘사했다. 갱년기라고 하지만 한자어 뜻을 살피면 경년이 맞지 않겠느냐는 작가의 이의제기에 동의한다. “열세 시간 진통 끝에 낳은 첫아이였다. 내 젖과 청춘을 먹여 키운 아이였다.”는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아이지만 사춘기를 겪으면서는 도대체 저 아이가 내가 낳은 그 아기가 맞나 싶은 순간은 나만 만나는 것이 아니니.     




반면 4편은 소설이라는 형식에 잘 담긴 낯선 이야기라 후루룩 읽히지는 않는다. 주춤거리거나 되돌아가 뒤적이게 한다. 익숙하게 남자 주인공이 있던 자리에 여자 주인공을 놓는다든지, 화장과 원피스, 하이힐을 여자의 천형인 것처럼 장치해서 암묵적 동의나 방관도 죄목이 된다는 걸 알린다든지, 여자가 하기에는 힘든 일을 잘 해내며 남자 손이 달려있다고 하는 그로데스크함이라든지, 성별 상관없이 생명이라 소중한 공간은 화성이라야 가능한 것처럼 이야기를 안드로메다쯤으로 보내버린다든지 하면서. 작가 중 누구는 “페미니즘을 알게 되고 나는 전보다 한결 자유로워졌다. (중략)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롭지 못했다. (중략) 내가 나 자신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는 오염된 일부가 발견될 것 같았다. 두려움을 이기고 단 한 발짝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로 이 소설을 썼다.”라고 말한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겪는 자유함과 불편한 마음을 작가가 문장으로 표현했다. 공감함으로 힘이 되는, 문학의 효용을 뻐근하게 만났다.  



   

독서모임에 모인 이들이 뒤에 실린 4편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82년생 김지영 영화 이야기도 나왔다. 책 보다 영화가 못하다며 언성을 높이는 사람도 있다. 모인 사람들과 이야기 나눠보고 싶다며 말을 꺼낸 그녀가 먼저 이야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반반으로 나뉜 의견을 만났다고. 펑펑 울고 공감하면서 위로받았다는 반, 도대체 저 상황이 왜 힘든 건지 도무지 이해 못하겠다는 반. 그녀는 앞쪽 반에 속한다면서 책 읽는 사람들의 의견이 궁금하다고 했다. 모인 열두 명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경험과 해석을 내놓았다. 책을 비껴 난 이야기지만 같은 주제의 이야기라 이어간다. 저마다 삶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기 시작해 이야기는 더 뜨겁다. 열심히 들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이방인임으로 귀를 한껏 열고 눈 마주치며 이야기가 끝나면 박수도 치면서 호응했다. 같은 텍스트를 읽어도 와닿는 부분이 다르고 해석하는 바가 다르다. 같은 영화를 보고도 감응은 확연히 온도차가 난다.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만나서 의견을 자유로이 말할 수 있는 대화의 장이 좋아서 굳이 이 자리에 앉아 있고 싶었으니까.     




마칠 시간이 되어가니 말 가장 안 한 날더러 한 마디하고 마무리하란다. “페미니즘의 목표는 권력을 남성으로부터 ‘탈환’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권력에서 폭력을 제거하고 권력의 의미를 바꾸는 데 있다. 그리고 내 생각에 페미니스트는 답이 없는 두 선택에서 억지로 답을 고르는 게 아니라 선택지를 늘리거나 질문 자체를 바꾸는 사람이다.” 소설 읽으며 함께 읽었던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의 한 구절을 읽었다. 함께 읽으면 좋을 책이라 소개하면서. “나에게 페미니스트란 차별과 폭력을 경험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해석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진 사람, 알고자 하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페미니스트는 올바름의 이름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지를 질문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이해  안 된다는 4편의 이야기는 소설임을 잊지 마세요. 앞에 실린 3편이 마치 생활수기처럼 편안히 읽히는 바람에 자칫 소설임을 잊으신 건 아닌지 생각해보면 좋겠어요. 소설은 있었던 사실이 아니라 있었음직한, 혹은 있었으면 했던 것들을 소환하는 일이에요. 현실 너머의 일들이거나 현실이 아직 만들어내지 못한 일들이지요.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언지를 생각 해보면 그리 어렵지 않을 텐데 앞에 3편이 너무 편안히 읽힌 까닭에 상대적으로 혼란을 겪으셨을 수도 있겠다 싶어요. 영화와 책의 기능이 다르다는 것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좋은 책을 많은 사람이 보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질 못하니 좋은 책이 영화로 만들어졌고 화제가 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제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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