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공감의 글쓰기
김해도서관 두 번째 저자 특강이다. 작가 은유는 이해하고 공감하는 글쓰기를 어떻게 하느냐는 방법론으로 들어가기 전 왜 써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말문을 열었다. 나를 나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내 삶을 타인과 공유하기 위해서, 자기 생각과 의견을 가진 시민이 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꼽으며 김달님의 책을 추천했다. 본인이 추천사를 썼다는 얘기를 숨기지 않으면서. 김달님의 책을 보면 ‘아, 다른 사람은 이렇게 사는구나!’라고 깨달을 수 있는 글이라기에 책 제목을 메모장에 적어 넣었다.
김달님은 자신의 삶을 타인과 공유하면서 자신에게는 위안과 용기를, 그녀의 두 사람에게는 자랑스러움과 사랑스러움을, 독자에게는 이해와 공감을 안겼다. 기억이 자꾸만 없어져 버리는 오십 살 더 많은 할아버지를 보며 글 쓰는 사람이라 다행함을 느꼈다는 김달님은 이제 엄마가 될 수 있겠다고, 글 쓰는 사람으로 살 수 있겠다는 고백을 한다. 쓰기 전과 쓴 후의 김달님은 실존은 같으나 본질이 달라졌다. 엄마 없이 서른 해를 살아낸 여성이 엄마가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꿈을 잊고 살았던 그녀였었다.
경주에서 살다 창원대학교 기숙사에 입소하며 창원에서 독립생활을 시작한 이야기라 익숙함이 안기는 문장을 자주 만났다. 창원대 본관, 인문관, 도서관, 기숙사를 눈앞에서 보는 듯 이미지로 그려가며 읽는 이야기는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보여주기가 절로 이루어져 뜬금없는 경험의 값어치를 체감했다. 경험은 이해를 돕는다기보다 경험이 주도적으로 이해를 하게도 한다. 집 앞에서 해마다 거창한 홍보로 무장하고 거행되지만 불편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국화축제에 다녀간 이야기는 격하게 공감됐다.
사진이 많고 여백이 많은 223쪽 분량 한 권의 책을 읽으며 다섯 번 눈물을 흘렸다. 정확하게는 눈물은 네 번. 손녀가 성장통으로 다리가 아프다는 걸 모르는 할머니가 손녀의 다리에 물파스를 발라주며 나처럼 불편한 다리가 되지 말라며 아프지 마라 아프지 마라 하신다. 할머니의 그 마음이 내게 이입이 되던 순간 코 끝이 쨍하게 아팠다. 배에 힘이 들어가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눈에도 힘주며 참으려고 했던 눈물이 할아버지 휴대폰에서 전송되지 못한 메시지 함에 남겨진 ‘잘 지내니’를 보며 터지고 말았다. 쨍해진 코 끝이 아팠다.
휴대전화가 망가졌다는 걸 안 할아버지가 새 휴대전화를 사서 학교에 가져다주신 장면에서는 코 끝이 아프지도 않게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선걸음에 전화기만 건네주고 돌아서는 할아버지 모습이 내 눈앞에 영상으로 나타났다. 김달님에게도 여전히 종소리가 울리고 할아버지가 발길을 돌리는 참으로 기억되는 그 순간에서 뜬금없이 나는 엄마 생각이 났다. 툭 툭 방울지던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애달픈 기억으로 남은 엄마는 내게 눈물로 먼저 길을 연다.
첫 월급을 받은 달님은 할머니께 받고 싶은 선물 있느냐고 전화를 했다. 혼자 외출할 수 없는 할머니는 어디든 꽃이 있는 곳으로 나들이를 가고 싶단다. 가까운 곳에 1억 송이의 국화를 피우는 축제에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가기로 한 날 달님도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아끼는 원피스를 입고 가방도 신발도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것으로 골랐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할아버지 할머니도 한껏 차려입으신 모습이다. 최선을 다해 잘해보고 싶었던 세 사람이 어색하고 촌스러운 모습이어 웃음이 났다는 장면에서 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났다.
“난 네가 글을 쓰게 될 줄 알았다” 할아버지의 말이 문득 생각났단다. 마감 일을 기준으로 남은 날들을 지우듯 보내던 달님은 퇴근 후 두세 시간씩 카페에 앉아 글을 썼단다. 보여줄 사람도 없었지만 글을 쓰는 일만으로도 하루를 견디는 위로가 되었단다.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한 줄의 글이라도 써야만 한다는 이야기가 비로소 와닿았단다. 그러다 알았단다. “글을 쓰고 싶다는 의지가 나를 더욱 잘 살고 싶게 한다. 글을 써야 한다는 스스로에 대한 책임감이 오히려 나를 자유롭게 한다.”는 걸.
토요일 오후 깨끗하게 정돈한 책상에서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을 읽겠다고 앉았다가 집중하지 못해 펼쳐 든 책이다. 한 시간 삼십 분만에 완독하고 생각이 이어졌다. 마흔 개의 제목으로 남은 김달님의 두 사람 이야기를 읽으며 내게도 이 정도의 이야기는 너끈히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 내게도 넌 글을 쓰게 될 줄 알았다고 하는 이가 있었다는 생각. 다른 삶의 이야기만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글이 되기도 한다는 생각. 은유 작가의 특강 제목인 <이해와 공감의 글쓰기>를 나는 김달님의 글에서 맛보았으니 저자가 맞춤한 추천을 한 셈이라는 생각. 나는 이제 무얼 해야 할까 하는 생각, 생각,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