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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향여행자 May 12. 2016

고천암호에서 뜻밖의 선물에 웃다

백조의 호수여행-해남 고천암호 1편

강릉에서 해남까지는 무려 508km. 새벽에 출발해도 점심때쯤에나 도착하는 거리다. 서둘러 출발했다. 부모님과 필자. 이렇게 셋이서만 떠나는 여행은 세 살 이후로 처음이다. 그래서 어느 여행보다도 들떴다. 하지만 설렘은 오래가지 못했다. 며칠 전 이상징후를 보이던 아빠 차가 결국 말썽을 부리고 말았다. 예정에 없던 정비소가 첫 목적지가 되었다. 조마조마했다. 수리하는데 며칠 걸린다고 하면 어쩌지. 여행이 물거품이 될 위기다. 2시간 정도 걸릴 것 같다는 답변을 듣고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영화 <서편제>,<청풍명월> 속 갈대밭이 바로 이곳 고천암호다.호수의 둘레는 약 22km.  [아빠사진-고종환 제공]
여행은 돌발상황이 발생했을 때부터가
진짜 여행이라고 했다.


 차도 수리했으니 불안했던 마음도 정비한다. 어느덧 3시가 넘었다. 해남에 도착할 때쯤엔 해가 저물 무렵이다. 첫 여행지는 고천암호가 되었다. 일몰을 놓쳐서는 안 될 장소이기 때문이다. 


고천암호가 가장 아름다운 시기는 11월에서 2월 사이다.  해마다 수만 마리의 철새가 찾아온다. 특히 전 세계에서 서식하는 가창오리의 열에 아홉이 이곳에서 겨울을 난다. 해 질 무렵 가창오리떼의 군무가 단연 하이라이트. 해남팔경 중 하나로 손꼽히기도 한다. 봄엔 그 명장면을 볼 순 없다. 대신 또 다른 명장면이 숨어 있었다. 호수 옆으로 드넓은 청보리밭이 보인다. 바람의 지휘에 따라 초록 물결이 넘실거린다. 


청보리밭의 군무다.
    뜻밖의 선물이다.     

    

순탄치 않았던 여정의 고단함을 씻겨주던 청보리밭 풍경 [아빠 사진-고종환 제공]

풍경에 마음이 빼앗겨서일까. 한사코 사진 찍는 걸 거부하던 엄마가 카메라 앞에 섰다. 소녀 같다는 말에 수줍어하는 엄마. 오랜만에 행복해하는 엄마를 본다. 환하게 웃는 미소에 덩달아 웃는다.      

웃는 엄마를 앞으로 더 많이 카메라에 담고 싶다.

엄마는 카메라에 찍힌 자신의 얼굴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엄마의 일상이 오버랩된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가게 문을 연다. 시계의 분침처럼 재봉틀이 돌아간다. 손님이 오면 재봉틀 소리는 잠시 멈춤이 된다. 이불을 사러 오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시장에 장을 보러 왔다가 잠시 들르는 손님도 있다. 단골손님에겐 해우소가 되어 준다.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엄마의 손은 쉬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엄마는 바쁘다. 타지에 있는 딸들에게 보낼 반찬을 만든다. 혹여 밥을 거르지는 않을까. 자신의 피곤함보다 자식 걱정이 늘 먼저다. 엄마의 하루는 자정이 넘어서야 끝이 난다.      


엄마의 하루에서 엄마는 없다.
누군가를 챙기는 것으로 시작해
누군가를 챙기는 것으로 끝이 난다. 


거울을 들여다볼 여유조차 없는 엄마. 그런 엄마가 카메라 속 자신을 보는 모습은 낯설었다. 여행에 와서야 비로소 자신을 보는 여유를 찾는다.       


    

해가 저물어 간다. 아빠는 일몰을 가장 아름답게 담을 수 있는 장소를 찾는다. 그러다 셋이 입을 모아 ‘여기’라고 외친 곳을 발견한다. 위치를 확인해보니 연곡교다. 그곳에 서면 국내 최대 갈대군락지라는 말을 실감한다. 여전히 작년의 가을을 붙잡아 두고 있는 듯하다. 곳곳에 갈대가 무성하다.  

    

함께 바라본 일몰,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느끼다. [아빠 사진-고종환 제공]

봄과 가을이 공존하는 가운데 해가 뉘엿뉘엿 넘어간다. 해남에서 일몰을 보는 건 처음이다. 아빠도 처음. 엄마도 처음이다. 지금이 더없이 소중하다. 언제 또 이 경험을 할 수 있을까. 혹여 날씨가 흐렸다면 볼 수 없었을 일몰. 맑은 날씨인 것에도 감사하다.      

아주 잠시라도 좋다. 하던 일을 멈추고 지금을 느껴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다. [아빠 사진-고종환 제공]


해가 저물어가는 풍경을
  몇 번이나 보며 살아갈까. 


손에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엄마의 말에 괜스레 뭉클해진다. 함께 바라본 일몰은 필자의 마음뿐 아니라 아빠와 엄마의 마음에도 화석처럼 새겨진다.    

  

여행 꿀팁

1. 주소 :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고천암로 752 (또는 ‘고천암방조제’ 검색) 

2. 일몰 촬영 포인트 장소는 연곡교다. 호수를 한 바퀴 돌다 보면 중간쯤에 다리가 나온다. 그 다리가 연곡교다. 혹시 못 찾을 경우 ‘해남 연곡교’를 검색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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