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나침반 하나만 들고 갔던 길을 계속가 - I'm still here
이제 딱 뉴질랜드에서 산지 10년이 되었다. 2015년 11월 우리 가족 모두가 태어나고 자란 대한민국을 떠나 한 번도 밟아 본 적 없는 땅에 부푼 꿈을 안고 뉴질랜드에 도착하였다. 이번 글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뉴질랜드에 어떻게 정착하게 되었는지.
30대 초반의 나에겐 모든 것이 막혀 답답했다. 그 당시 한국 사회는 우리 부모 세대가 했던 방식 그대로 열심히 일을 하면 좋은 삶이 찾아올 것이라 하였지만, 난 큰 벽을 보았고 느꼈다. 꿈조차 꿀 수 없었다.
그런 막막함에 친구와 도전했던 사업은 갈기갈기 인간관계까지 찢어버렸다. 그렇게 내 인생이 표류하고 있을 때, 첫째 아이가 태어났다. 무거운 책임감으로 마음은 더 복잡했고, 답답했으며 꿈을 꿀 수가 없었다.
당시 열심히 즐겨 듣던 여행 팟캐스트가 있었다. '탁피디의 여행수다'. 거기에서 뉴질랜드 캠퍼밴 여행에 대해 시리즈로 이야기한 적이 있다. 팟캐스트에서 묘사하는 태초의 자연, 쌍무지개, 에메랄드빛 호수, 밤하늘을 가득 메운 별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런 천국 같은 곳에서 한번 살아볼까?'라는 생각을 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뉴질랜드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삶의 만족도, 교육, 인종 차별, 경제 등등.
온라인에서 명품 시계를 고르듯, 한 번도 만져보지는 않았지만 그것의 쓸데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스펙과 다른 사람들의 리뷰만으로. 난 그렇게 신중히, 하지만, 전혀 신중하지 않게 한 번도 밟아보지 않은 곳에 내가 이주해서 산다고 결심을 했으며, 그것도 혼자의 몸도 아닌 가족을 데리고 가기로 결정을 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막다른 길에 선 난 참 무모했고 용감했다고 생각이 든다. 아니,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다. 배수진을 친 전장의 장수처럼 용감해질 방법밖에는 없었다.
'꿈'이란 단어에는 크게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 1. 잠을 자는 중 경험하게 되는 꿈과. 2. 실현시키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 신기하게도 영어 'Dream' 또한 두 가지 뜻을 담고 있다.
왠지 모르게 어릴 때부터 난 내 미래를 그리고 꿈꾸는 것을 좋아했다. 그렇게 하여, 내 개인 이메일 계정 아이디는 미래를 꿈꾼다는 의미로 정했고 지금도 그것을 사용하고 있으며, 인생을 배에 비유하기를 좋아한다.
인생이란 배는 지금 어디를 향하는가? 종착지가 없는 배는 쉽게 길을 잃고 표류하게 되지만, 분명한 종착지가 있는 인생은 나침반의 방향에 따라 꾸준히 나아간다면 언젠가 종착지에 도착하게 된다. 안개가 자욱해 앞을 가릴지라도. 지금의 폭풍이 험난할지라도. 높은 확률로 목표한 곳에 도착할 수 있다. 지금도 내게 무엇이 나를 흥분시키고, 한 발짝 전진하게 만드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꿈”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뉴질랜드 이민을 결정하고 제일 먼저 한 것은 내가 어떻게 그곳에서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난 기술이민에 전혀 쓸모없는 기술과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체육 관련 그리고 경영학 복수 전공. 중소기업의 영업/관리를 맡아서 8년 경력. 거기에 영어 실력은 전무. 마지막 토익점수가 700점을 약간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땐 젊었고, '부딪히면 되겠지'라는 터무니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면서, 좀 진지하게 '내가 무엇을 좋아하지? 내가 무엇을 잘할 수 있지?' 진작에 또는 적어도 대학교 진학할 때 했어야 할 나를 알아가는 단계를 그때 가지게 되었다.
그 당시 강점검사(Strength Finder) 책을 읽고 검사를 해보면서 내가 어떤 부분에 강점이 있는지 알아보고, 한국인이 컴퓨터공학과를 가면 좀 수월하게 직업을 구할 수 있다는 주변의 조언에 따라 오클랜드 대학교 임시 입학허가서를 가지고 떠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이민을 결심하기 전까지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던 것 같다. 대다수의 우리 세대가 그랬듯. 고등학교 때는 대학을 위해 공부했고, 대학교 때는 캠퍼스의 낭만도 잠시 취업 준비에 어학연수로 바쁘게 앞만 보며 달렸고, 취업하고 결혼했다.
이민을 결정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고민하던 그때가, 어쩌면 내 인생 처음으로 '나'라는 사람에 대해 진지하게 들여다본 순간이었다. 껍데기뿐인 학벌. 경력. 타이틀. 인맥. 다 필요 없이. 본연의 나를 바라본 순간. 이 과정, 즉 '객관적으로 나를 아는 것'이 바로 메타인지의 시작이었고, 이를 통해 나는 조금이나마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좋아하는 일을 즐겁게 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백지장'에서부터 생각하는 방식은 지금도 나에게 큰 도움이 된다. 어제도 회사 회의 중에 내가 제안했었던 내용이다. UX/UI 디자이너를 새로 뽑는데 우리가 기존에 생각해 놨던 디자인에서부터 업무를 주지 말고 새로운 신선한 아이디어로 시작할 수 있도록 아주 최소한의 프로젝트 정보만 주고 어떤 식으로 접근했으면 좋겠는지 첫 업무를 주면 어떨지. 의식적으로 아무 제약이 없다고 생각하고 아이디어를 내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에 심어 놓은 '그건 안돼', '나는 못해'라는 장벽들로 인한 생각의 장애물을 피해 갈 수 있는 것 같다.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뉴질랜드 이민'이라는 결정 자체가 내 인생 가장 큰 '백지장'을 꺼내든 순간이었다. 기술이민에 쓸모없는 경력, 전무했던 영어 실력, 아는 사람 하나 없던 그 막막한 백지 위에 '꿈'이라는 나침반 하나로 10년의 그림을 그려왔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나는 또 어떤 새로운 백지를 꺼내들 준비가 되었을까. 혹은 나도 모르게 '이젠 안돼'라는 새로운 장벽을 세우고 있지는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