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채워야 할 빈 공책이 많아 -고마운 숨
한국에서 '그럭저럭' 통했던 저만의 공부법이 뉴질랜드 입학과 동시에 산산조각 났다. 입학의 문턱을 넘자마자 마주한 진짜 레이스는, 30년 넘게 '정답 찾기' 교육에만 익숙했던 내게 큰 문화적 충격이었다. 두 나라의 '공부 방식'은 그 결이 완전히 달랐고, 특히 대학의 첫 과제는 단순한 에세이가 아니라, 나의 '사고의 틀' 자체를 바꾸는 도전이었다. 이 글에서 내가 뒤늦게 깨달은 공부법의 차이와, 글쓰기가 어떻게 내 삶과 커리어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는지 이야기해 보려 한다.
뉴질랜드 학업 시작 첫 충격은 '학술적 글쓰기' 방식이었다. 한국에서의 교육이 정답을 찾는 '단답식'에 가까웠다면, 뉴질랜드 대학은 비판적 사고를 펼치는 '서술형'을 핵심으로 삼는다.
대학교 1학년부터 글쓰기 관련 과목을 강력히 권장하거나 아예 의무화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단순한 보고서 작성을 넘어, 사고의 틀 자체를 훈련시키는 과정이었다. 학생들은 다양한 자료를 회의적으로 분석하고 종합하는 비판적 분석을 배우고, 명확한 주장을 세우고 뒷받침하는 논증(Argument) 구축 능력을 훈련받았다.
게다가 지적 윤리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정확한 인용(Citation) 및 참고문헌(Referencing) 작성법을 익혀야 했다. 솔직히 그 당시에는 "왜 이렇게까지 문장의 구조와 형식에 집착하지? 조금은 쓸데없다"라고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현업, 특히 팀워크가 중요한 환경에서 일하면서, 그 혹독했던 글쓰기 훈련이 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일목요연하게 표현하여 상대를 설득하는 과정은 업무의 핵심이다. 글쓰기는 이 과정을 가장 효과적으로 훈련하게 도와주는 도구이다.
요즘 아마존 같은 글로벌 기업에서는 파워포인트(PPT) 사용을 지양하고 서술형 문서를 통한 회의를 권장한다고 한다. 이는 슬라이드의 요약된 글머리 기호 뒤에 숨지 말고, 깊이 있는 사고와 설득력 있는 문장으로 생각을 완전히 표현하도록 독려하는 문화이다.
나는 주장해야 할 일이 있을 때 되도록 생각을 정리한 3~4페이지 분량의 문서를 준비해 온라인에 공유한 뒤 회의를 진행한다. 문서를 작성하는 과정 자체가 내 생각을 한 번 더 다듬고, 다시 배열함으로써 생각을 논리적으로 검증하는 데 도움을 준다. 명확하고 구조화된 글 덕분에 바로바로 의견을 교환해야 하고 논쟁하는 회의 시간에 부족한 스피킹 실력까지 커버할 수 있으니, 나에게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이러한 탁월한 의사소통 방식 덕분에 많은 엔지니어들이 부족해하는 영역에서 강점을 두각 할 수 있었다. 이는 백그라운드에서 데이터와 코딩만 다루던 엔지니어였던 나를 프로덕트 개발 참여 확대와 함께 현재의 자리까지 올라오는 만든 중요한 발돋움이었다.
현재 스타트업에서 빠른 페이스로 일하고, 재택과 사무실을 오가는 하이브리드 근무 형태를 병행하면서 의사소통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거기에 우리 회사는 오버커뮤니케이션을 모토로 의사소통 굉장히 중요함을 팀 모두에게 강조한다.
우리 회사는 모두가 시간을 맞춰야 하는 미팅보다는 슬랙(Slack)을 통한 효율적인 비동기적(Asynchronous) 소통을 문화로 정착시키려 노력한다. 이 모든 것이 결국 '글쓰기'의 능력을 요구한다.
얼마만큼 간결한 문체로, 효율적으로 이야기하여 자신의 의견을 명확하게 전달하는가?
이 능력이 업무의 성패를 좌우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불혹(不惑)을 넘긴 후에야 비로소 글쓰기의 중요성을 몸소 체감하고, 책상 앞에 앉아 글쓰기를 시작하였다. 글을 쓸 때야 말로 생각이 확장되기도 하고 정리되기도 하니, 글쓰기야말로 내 생각을 담아내는 캔버스이자, 동시에 두뇌를 위한 메모리 정리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컴퓨터가 임시 메모리(RAM)를 점유하는 불필요한 프로세스들을 종료하여 중요한 작업(심층적 사고)을 위한 공간을 확보하듯이, 우리 두뇌에게도 그런 '정리'가 필요하다. 글쓰기는 머릿속을 가득 채운 무수한 잡념과 아이디어를 종이 위에 '토해내는' 과정으로, 비로소 핵심 사고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주는 게 아닐까?
나는 글쓰기를 통해 불필요한 정보를 조금씩 덜어내고 재정비하면서, 정보를 효율적으로 가공하고 통찰력을 길러내는 능력이 생겨난다고 믿는다. 이제 공부의 시작은 지식 습득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구조화하는 글쓰기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AI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단순한 지식 습득보다는, AI가 빠르게 제공해 주는 지식과 정보를 조합하고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구조화하는 능력이 더 중요해졌다는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 글쓰기는 선택이 아니라, 더더욱 중요해진 필수 능력이 된 거 같다.
글쓰기는 특별한 사람들의 거창한 작업이 아니다. 송숙희 작가가 말했듯이, 그것은 '글을 쉽게 쓰는 것'부터 시작되는 쉬운 습관이다. 글쓰기에 재주가 전혀 없던 나도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글쓰기는 당신의 생각을 명료하게 만들고, 당신의 삶과 경력을 논리적으로 이끌어갈 가장 강력한 도구라 믿는다. 지금, 단순히 정보를 소비하는 시대를 넘어 논리를 구축하는 '지식 생산자'가 되기 위해 종이와 펜을 꺼내어 당신의 생각을 문장으로 적어보자. 그 작은 시작이 당신이 더 깊이 사고할 수 있도록 돕고 조직과 사회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고 리더(Thought Leader)'로 성장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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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이민 10년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