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툰 러시아어와 남색 하늘

블라디보스토크, 어설퍼도 유쾌한 도시

by 키위

외국어 고등학교에 진학해 3년 내내 러시아어를 공부했다. 졸업 이후 언어에서 손을 떼어버린 탓에 배움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어느 날 여행 프로그램을 통해 블라디보스토크를 마주했다. 러시아 특유의 차가운 풍광 위로 학창 시절의 기억이 피어올랐다. 여행을 좋아하는 대학 친구에게 연락했다. 러시아어를 모르는 친구는 흔쾌히 동행을 약속했다. 그렇게 우정 십 주년을 기념하며 잊힌 활자를 찾아 떠나는 여정에 뜻을 모았다.


러시아 국적기에 올라타며 색다른 여정의 막이 올랐다. 북한 상공을 가로지르는 특권으로 여행의 출발이 특별했다. 두 시간 반의 비행을 거쳐 러시아 땅을 밟았다.


블라디보스토크 공항 밖으로 나와 차가운 공기를 마시기도 전에 억센 호객꾼에게 이끌려 택시 뒷좌석에 앉았다. 기사의 투박한 대화를 들으며 동면했던 러시아어가 고개를 들었다. 간단한 단어들이 귀에 꽂히는 현상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택시 기사님과 러시아아로 대화하다 보니 오십 분이 훌쩍 지났다. 숙소에 짐을 풀고 본격적인 탐험을 시작했다.




첫 일정은 혁명 광장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을 기념하며 건설된 장소였다. 광장 중심에 세워진 거대한 동상들이 웅장한 자태를 뽐냈다. 사실 이곳은 한인 강제 이주민들을 모아두었던 슬픈 역사를 품고 있었다. 영문도 모른 채 떨었을 강제 이주민의 불안한 마음을 얼마나 헤아릴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었다. 화려한 겉모습과 대비되는 씁쓸한 과거가 짙은 여운을 남겼다. 탁 트인 공간이 왠지 쓸쓸한 감상을 자아냈다.


발걸음을 옮겨 도착한 해양 공원은 음산한 기운을 풍겼다. 흐린 날씨 탓에 유원지의 기구들은 온기를 잃고 덩그러니 남았다. 적막한 분위기를 느끼며 도시의 차가운 첫인상을 경험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에 옷깃을 여몄다. 텅 빈 공간에서 화려한 구조물들이 이질감을 자아냈다.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환상과 다른 현실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스산함마저 오랜 친구와 나누는 유쾌한 변수로 삼았다.


소문으러 듣던 아르바트 거리로 향하는 길목에서 현지인을 마주쳤다. 한국어를 공부한다는 러시아 여인이 다가왔다. 어색한 글씨로 성경의 한 구절을 적은 엽서를 건넸다. 고마움을 담아 ‘스파시바(Спасибо)’라는 인사를 뱉어냈다. 잠들어 있던 발음에 친구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미소가 만개하더니 잿빛이었던 하늘이 걷히며 보도블록 위로 볕이 쏟아졌다. 러시아 특유의 고풍스러운 건축물들이 이색적인 정취를 뽐냈다. 아름다운 아르바트 거리를 따사로운 햇살과 함께 카메라에 담았다. 얼어붙었던 몸이 눈처럼 스스르 녹아내렸다.




벽화가 그려진 골목들은 상상했던 감흥을 밑돌았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 사람들로 북적이는 카페로 향했다. 빈자리에 앉아도 되는지 ‘모쥬나(Можно)’라는 물음에 ‘뽜좔루스따(Пожалуйста)’라는 대답을 곁들였다. 그리고 시원한 니트로 커피를 주문했다.


‘아진(Один)’, ‘드바(Два)’ 숫자를 세며 음료를 받았다. 서툰 러시아어로 십 대 시절의 교실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단어장을 짚어가며 발음을 연습하던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삼 년의 시간을 꺼내어 쓰는 쾌감이 상당했다. 그러나 한 모금 들이켠 액체의 강렬한 산미에 혀를 내둘렀다. 신맛을 즐기는 친구의 표정을 보며 입맛의 다름조차 유쾌한 에피소드로 넘겼다.


연해주 용사들을 기리는 정교회 사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풍스러운 사원 주변을 거닐며 도시 곳곳에 스며든 종교의 흔적을 훑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하늘은 붉은 노을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해 질 녘 무렵 탁 트인 바다로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잔잔한 물결을 바라보며 시원한 산들바람을 맞았다. 낯선 거리를 누비며 쌓인 하루의 고단함을 바닷바람에 씻어냈다.


어둠이 내리자 허기가 밀려왔다. 한국인에게 유명한 어느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설렘을 품고 주문한 킹크랩은 짙은 아쉬움을 남겼다. 번거로운 손질과 부족한 살점에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화려한 만찬의 실패조차 귀여운 오점으로 여기며 서로를 향해 폭소를 터뜨렸다. 숙소 창문 너머로 남색 밤하늘을 응시하며 첫날을 마무리했다.




잊은 줄 알았던 십 대 시절의 배움이 미지의 땅에서 튀어나오는 신기한 경험을 한다. 미디어가 심어준 환상과 어설픈 현실 사이의 간극을 받아들인다. 예상과 다른 풍경 앞에서도 실망하는 대신 웃음을 짓는다. 비싼 음식보다 곁에서 발을 맞추는 이의 존재가 큰 위안을 준다. 오랜 시간이 쌓인 관계는 어색한 공기를 덮어주는 담요가 된다. 빈틈투성이의 하루를 진솔한 온기로 채워 나가며 앞으로의 여정을 기대한다.


화, 금,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