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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키위 Jun 03. 2023

그 예술은 잘못됐다

혐오에서 연대로 나아가는 문학에 대하여

  글을 5년 동안 써왔다. 계기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나간 구 공모전이었다. 구 공모전에서 시로 입상한 이후로는 소설을 써왔다. 더 잘 쓰기 위해 여러 문예 커뮤니티를 전전했고, 여러 사람의 여러 글을 접할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3년 정도 ‘글판’에 있다 보니 잘 쓰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눈에 들어왔다. 아픈 기억이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은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가 병상에 오랜 기간 누워있어 돌봐야 했거나, 어떤 이유로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을 앓았거나, 건전하지 못한 연애를 겪은 사람들이었다. 아픈 경험은 개인에게 자신의 내면을 돌아볼 기회를 제공한다. 그 기회가 결과적으로 좋고 나쁘고를 떠나, 타인에 비해 자신에게 깊게 파고들어 본 경험이 있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세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경험이 문학적으로 승화될 수 있다면 좋지만, 그 방향의 결과가 늘 좋지만은 않았다. 글에서 자신의 자아가 너무 강한 몇몇 사람들은 글 속에서 무의식 속에 등장인물을 자신의 세계관에 맞게 재단하거나 대상화하곤 했다. 언젠가 자신이 ‘남성향 웹소설’을 쓴다며 자신의 글을 평가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의 ‘남성향 웹소설’은 그가 얼마나 젖가슴에 집착하는지 알 수 있게 쓰여 있었다. 주인공은 택배를 받으러 나갈 때 알몸으로 나갔고, 그가 움직일 때마다 젖가슴이 타원을 그리며 움직였다는 문장을 읽자마자, 나는 창을 끄고 파일을 삭제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글을 읽은 다른 이들이 먼저 이 불쏘시개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날리고 있었다. 놀라웠던 점은 그가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째서 특정 독자층의 오락을 위해 사람의 몸을 대상화하는 문장을 쓰는지, 그리고 그 특정 독자층을 ‘남성’이라고 설명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혐오와 폭력의 문학


 ‘에고 ego가 강한 남성 작가의 근현대 소설’에 대한 이야기는 이러한 대상화와 떼어놓을 수 없다. ‘무진기행’으로 유명한 김승옥이 대표적이다. 그의 단편 소설에는 아무런 이득 없는 혐오 표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갈보’나 ‘걸레’와 같은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이 그렇다. 김승옥의 소설 중 ‘건’은 미성숙한 소년 주인공의 정신적 성장을 그리고 있는데, 문제는 그 성장의 원인이 주인공의 형 일행이 윤희라는 인물을 겁탈할 수 있도록 돕는 행위라는 것이다. ‘칼의 노래’로 유명한 김훈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의 소설 ‘공터에서’는 여자아이의 성기를 묘사하며 인물의 생각을 서술해 놓았다. 김훈은 ‘언니의 폐경’이라는 소설에서 월경에 대한 철저한 남성의 망상(혹은 환상)을 여성 서술자의 입장에서 노골적으로 서술하여 논란이 된 적도 있다. ‘언니의 폐경’은 2005년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했다. 당시 여성의 삶이 얼마나 남성적 시각에서 평가되어 왔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김승옥이나 김훈처럼, 근현대 남성 작가의 소설에는 오로지 인물의 심리 상태나 가치관을 이루기 위한, 혹은 그 목적조차 지니지 못한 성적 대상화와 혐오가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그들의 소설은 추앙받는다. 예술가의 변태적인 시선이 예술이란 이름으로 포장되는 것은 너무도 일상적이다. 한편으로는 문단이 지나치게 폐쇄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미투 운동이 문단을 휩쓸었던 때가 있었다. 민족 시인이라고 칭송되던 고은의 몰락이었다. 미성년자인 제자에게 성적인 발언을 일삼고, 그를 무고죄 범죄자로 몰아세운 박진성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중년 이상의 남성 작가들은 어째서 여성에 대한 왜곡되고 뒤틀린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구시대적 사상이 문학에서는 뒤늦게 걷어지고 있는 것 같다.



예술의 정체성


 예술을 구성하는 것은 창작, 감상, 소통 세 가지이다. 소통은 예술의 공유성을 의미한다. 일기를 수필로 바꾸는 것이 소통이다. 창작에서 그치지 않고, 작품이 소통 가능성을 내재하여 공유될 때, 감상이 이루어지고 비로소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예술이 소통한다는 점에서 예술가는 늘 자신의 작품이 타인에게 어떻게 감상되는지 생각해야만 한다. 예술가는 결국 무용, 음악, 극, 문학 등으로 형상화한 자신의 세계에 감상자를 초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난 시간 동안 예술에는 그 분수에 맞지 않는 거창한 권력이 부여되어 왔다. 이유 없는 혐오와 폭력이 예술로 포장되어 박수를 받아왔고, 그것을 지적하는 순간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문학은 그런 측면에서의 소통에 어느 정도 실패했다. 문학이 여성을 소비하는 방식은 지난 시간 동안 성적 대상화와 상품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소년의 성장을 위해 여성이 강간당하거나, 따뜻함을 묘사하기 위해 여아의 성기를 묘사하거나, ‘뜨겁게 몸속에서 밀려 나오는’ 생리혈을 묘사했다. 이 대상화의 과정에서 인격은 제거된다. 인물의 신체나 기질은 작가의 입맛에 맞게 재단되거나 그들의 뒤틀린 시선을 배설하는 수단이 되곤 했다.

여성에게 부여되는 서사 또한 너무도 빈약했다. 주인공을 비롯한 대부분의 등장인물은 남성이거나, 여성이어도 그 설정과 인물성이 부족해 소설 속에서 남성 주인공의 언행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장치로 소모되어 왔다.



폭력에서 벗어나기


 그럼에도 문학계는 변화하고 있다. 작가의 자아가 두드러지게 드러나 독자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던 예전에서, 점차 ‘창작’ 만큼이나 ‘소통’과 ‘감상’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2023년 젊은 작가상의 수상자 일곱 명은 모두 여성이었다. 서점에서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는 ‘여성 서사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여성 작가의 수가 늘어나고 여성을 다루는 문학이 느는 것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이러한 움직임이 문단을, 그리고 문학 소비자를 지배하던 남성중심적 문학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의 현대문학은 ‘연대/화합 리얼리즘’ 정도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은 작가의 자아와 내면세계를 형상화하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에 소외된 삶에 주목하고 조명하기도 한다. 과학소설 작가 김초엽의 소설에서는 여성 주인공이 자주 등장한다. 과학소설이라는 장르적 특징에 걸맞게, 그의 세계는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사회가 그려지곤 한다. 그러나 그의 소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과학이 발달한 미래사회에 여성, 미혼모,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묻는다.


 글을 쓰는 입장에서, ‘작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늘 가슴에 품고 있다. 그 답은 작가는 ‘폭력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거칠게 말해서, 소설 속 등장인물이 겪는 갈등은 폭력이다.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 개인이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 개인이 내적으로 가하는 폭력 등등. 그리고 그 폭력의 대부분은 사회 구조에서 기인하곤 한다. 소설은 사람의 삶을 다루고, 그 삶에는 다양한 폭력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갈등을 다루는 작가는 그 누구보다 폭력을 잘 인지하고 또 이해해야만 한다. 그리고 작가는 사람을 다룬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인격체를 빚는 소설가는 그 인격을 존중함으로써 그와 닮은 삶 또한 포용할 수 있다. 유해한 사회에 대항하여 무해한 시선과 존중으로 여러 삶과 연대하는 것. 그것이 현재의 문학의 의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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