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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키위 Dec 02. 2023

사라지고 노출되는 얼굴과 이름, 묵살되는 목소리를 위해

이라영 - <폭력의 진부함>을 읽고

 오랜 세대를 거쳐 대물림된 폭력의 고리를 끊어내는 데에는 그 무엇보다 폭력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폭력Violence 은 물리적인 폭력뿐 아니라 언어적, 비대면적, 성적,  그 이외의 폭넓은 범주에서 행해지는 것임을 먼저 짚어야 한다. 더불어 폭력의 현장에서 개인은 얼굴, 이름, 목소리가 지워지는, 철저히 폭력의 주체자에 의해 타자화된다는 점도 주의해야 한다.


 서문은 철저히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아온 사회적 약자들을 조명한다. 본문에 의하면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차별을 희미하게 만들고 싶을 때면 소수자의 개별적 서사는 과하게 몸집이 부풀려진다’. BLM(Black Lives Matter)에 대해 ‘흑인도 범죄를 저지른다’고 말하거나,  성폭력 문제에 대해 ‘남성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식이다. 사회적 약자들이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사회가 예외로 치부해 온 그들의 서사는 보편적이고 포괄적으로,  정의로운 방식으로 제압된다. 결국 ‘늘 그랬듯이 그렇게 살라'는 말이다. 스피박의 말을 빌리자면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


 ‘복기’라는 소제목의 1 부에서는 말 그대로 저자 개인의 삶에 때 묻은 폭력에 대해 복기한다. 76년생의, 프랑스 유학생 출신인 저자가 겪은 내용이지만, 시간이 지났음에도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적인 어폐는 현재에도 유효하다. 가령 ‘미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그렇다.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에 대한 질문은 대개 그 질문자의 저의를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다. 내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거리낌 없이 말하거나,  여성학을 듣는다고 밝힐 때 들은 질문의 저의는 ‘어디 한번 들어보자’가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2부에서 저자는 폭력에 대하여 ‘타자화’라는 속성을 중심으로 분석하고, 제목 그대로 ‘진부한’ 폭력들을 조명하며, 이에 대항하는 움직임을 나열한다. 특히 성폭력을 중심으로,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하는 문화 매체들을 탐구한다. 박찬욱의 <아가씨>를 세라 워터스의 원작 <핑거스미스>와 비교하며, 남성 중심인물의 추가와 두 여성의 주체성 약화를 지적하는 등이다. 본문에 의하면 시대상을 담는, 문화를 담는 것이 예술인만큼, 현실에서와 마찬가지로 작품에서의 여성의 신체는 토르소가 된다. 그들의 얼굴, 이름, 목소리는 봉지에 씌워지거나 신문지에 덮이듯 사라지고, 오로지 남성의 성적 판타지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살덩이로써 전시된다.


 한편으로는 얼굴과 이름은 주체의 의지는 묵살된 방향으로 소비된다. 리벤지 포르노로 대표되는 ‘숨겨야 하는 여성의 체면’이 대표적이다. 남성에게 있어 리벤지 포르노는 무기이다. 그들이 이 무기를 휘둘러보는 피는 연인과의 이별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성에게 리벤지 포르노는 피해야만 하는 인격 말살이다. 똑같은 신체인데, 여성은 치부이고 남성은 무기이다.  개인의 얼굴과 이름에는 ‘녀’라는 수식어가 붙고, 개인의 의지는 묵살된 채 노출된다.  미투#metoo 는 그런 폭력의 피해자들이 스스로 얼굴과 이름을 드러내고 목소리를 낸 이례적인 운동이다. 본문의 우려처럼, ‘나도 당했다’라는 국내 언론의 번역이 불편하다.  ‘당했다’는 수동적인, 피해 사실에 집중하는 표현보단 연대에 그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


 <폭력의 진부함>을 구매한 지는 2년은 된 것 같은데, 올해가 되어서야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이 책을 추천해 준 사람은 같이 글을 쓰는 문우였다. 그는 반 농담조로 자신을 ‘메갈’이라고 지칭했는데, 가끔 자신의 어떤 구석들은 ‘한남’인 것 같다고 말했다. 요즘은 연락이 닿지 않지만, 가끔은 그의 자조 섞인 농담들이 그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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