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제게 갈왕은 후반부에 급부상한 인물이었어요. 갈왕이 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 희상귀와 처음 대면할 때였어요. 이때까지만 해도 설마 갈왕이 조경과 희상귀 아들인가? 그래서 희상귀를 보는 표정이 저리 심상치 않은가 했었습니다;; 그런데 희상귀의 단골 대사 ‘님이 나를 져버리지 않으면 나도 님을 져버리지 않겠다’ 이걸 읊는 걸 보면서, 아, 아들이 아니라 대체 희상귀구나 생각했어요. 그리고 희상귀에게 진상을 들은 후에는 조경한테 따지기도 하고, 조경을 의심하기도 하더라구요. 그러나 매번 조경의 되도 안한 헛소리에 넘어가는 것 같았어요. 근데 결말부를 보면 아니었담서, 다 알면서 속아주는 척 했던 것;;
조경이 사당에서 최고진상짓 하는 걸 목격할 때도 의부를 굉장히 안타깝게 바라보길래, 갈왕아 정신 차려라, 했었어요. 근데 그때 조경의 전리품들을 발견하죠. 사부의 반지, 이요의 팔찌, 고숭의 검. 설마 저걸 봤는데도 조경을 계속 믿으려나 했는데, 그래도 믿고 싶어하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결말부를 보면 갈왕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조경을 믿고 싶어하죠. 객행이랑 판 다 깔아놓고도 조경이 염귀의 트릭에 잠시라도 망설였다면, 그 판 다 갈아엎었을 것 같아요.
그럼 이 부자사이에 균열이 생긴 게 언제일까를 되짚어보면, 약인군으로 청풍검파 치고, 조경이 막회양이랑 쫓아왔을 때인 것 같아요. 그때 갈왕이 조경한테 ‘님이 나를 져버리지 않으면 나도 님을 져버리지 않겠다’ 이게 무슨 뜻인지 이제야 알겠다고 하잖아요. 그리고 그 이후에 잡혀온 아상에게 낭자와 할 말이 있다며, 객행이와의 만남을 먼저 제안한 것 같아요. 객행이도 자서구출, 조경복수 등 갈왕의 협조가 필요해서 손을 잡았겠죠. 이때 객행이는 가짜 열쇠를 넘기며 등관을 찾았고, 갈왕은 조경의 목숨만 붙여놓기를 약속받았겠죠. 그 외에 가짜 시신을 마련하고 염귀가 지키는 것, 영웅대회 때 세 악귀의 거짓증언 등 자잘한 것도 미리 얘기가 된 것 같아요.
이후 백록진 절벽에서 수세에 몰린 객행을 향해 자서가 폴짝 뛰어올라 칼 빼들고 같이 공격태세 갖춥니다. 생각해보면 객행이는 애초부터 자신의 복수에 자서를 끌어들일 마음이 없었던 것 같아요. 항상 자서가 같이 복수할거라고 했지, 객행이가 그에 대해 그러자고 답한 적은 없었죠. 여튼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조경이 헛소리 작렬하는데, 그때부터 갈왕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요. 이후 절벽 아래로 떨어진 객행을 향해 자서도 몸을 날리는데, 그 모습을 보고 조경이 엄청 깔깔거리며 열쇠 찾으러 가자고 해요. 그때 갈왕 표정이 측은+혐오+후회 오만 감정이 섞인 표정이었는데, 짐작을 해보자면 여튼 갈왕은 객행과 서로의 필요에 의해 손을 잡았습니다. 그래서 짜고 치면서 이 연극을 벌이고 있는데, 자서가 나타난 거죠.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자서가 객행을 위해 목숨을 걸고 죽음까지 같이 하려는 걸 보며, 자신의 상황에 빗대어 착잡한 심정이었을 것 같아요. 갈왕은 조경과 저런 관계가 되기를 원했겠죠. 그리고 조경은 갈왕을 어르고 달래기 위해서 저런 비슷한 소리도 했어요. 어떤 어려움도 너와 함께 하겠다, 뭐 이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고, 그걸 갈왕도 이미 깨달았습니다.
여튼 객행이가 절벽에서 떨어진 이후 무림인들은 술판을 벌입니다. 심란한 표정의 갈왕에게 조경은 술을 권하면서, 그제야 양자로 인정해요. 갈왕은 씁쓸하면서도 또 마음이 약해졌을 거예요. 그래서 영웅대회를 앞두고 염귀를 시켜서 마지막으로 조경에게 기회를 주죠. 근데 조경이 변할리가 있겠습니까. 실망스러운 답을 전하는 염귀에게 갈왕은 도박 비유를 하는데, 이 도박 비유는 이미 염귀가 이전에 옥에 갇혔을 때 갈왕에게 말한 적이 있어요.
도박으로 모든 걸 잃은 사람은 끊임없이 변명을 만들어 계속 도박에 빠지게 된다는 거죠. 그 위험한 도박의 대상이 염귀에게는 우구봉, 갈왕에게는 조경이겠죠. 그래서 갈왕이 염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염귀의 살길도 열어주죠. 그리고 굉장히 애잔하게 의부에게 기회를 준 것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도 마지막 기회를 주고 싶었다고 읊조려요.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조경을 향한 자신의 마음에 도박을 건 것 같아요. 이게 조경에게 도박을 건 거랑은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이미 상대에 대한 믿음은 없지만, 그래도 그 사람을 원하는 자신의 마음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요.
여튼 영웅대회 전날 무림인들은 다시 술판을 벌이는데, 이때는 카메라도 갈왕을 줌인으로 잡으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갈왕의 표정과 심경을 보여줍니다. 이제 내일이면 자신이 원하던 조경의 껍데기라도 갖게 되겠지요. 그렇지만 여전히 심란합니다. 이게 과연 본인이 원했던 건지 알 수 없겠죠. 그러면서 내일이면 의부가 무림맹주가 될 거라며 깜찍하게 웃어보이기도 해요.
드디어 영웅대회 날입니다. 막회양과 대결 중인 조경을 위해 갈왕이 암기를 날리는데, 일단 조경을 승자로 만들어놔야 객행이가 등장할 판을 깔아줄 수 있어서겠죠. 그리고 자신을 비난하는 의부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심신에게 누명까지 씌우는 걸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요. 의부의 진상짓은 이미 볼대로 봤지만 그래도 마음이 좋지 않았겠죠. 그리고 객행이한테 공격당하는 조경을 안타깝게 바라보기도 하고 차마 보지 못하기도 합니다. 부모 원한 풀고 있는 객행이를 세상 뿌듯하고 대견하게 보고 있는 자서랑은 대비됩니다. 이쯤오니 완전히 다른 방식의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어요. 서로를 위해 목숨도 걸 수 있는 지기, 상대를 이용하고 서로 속고 속이며 껍데기라 갖고자 하는 집착을 대비적으로 보여준 것 같았어요.
그리고 이미 객행이한테 사지경맥 다 끊긴 조경에게 다가와 도움이 될 거라며 단약을 먹이는데, 저것마저도 속인거죠. 그냥 입다물고 껍데기라도 내 옆에 있어, 이런 마음으로 건넨 것 같아요. 객행이가 생지옥을 보여주겠다고 했는데, 산송장으로 갈왕 곁에 있어야 하는 게 조경에게는 어쩌면 가장 큰 벌처럼 느껴졌어요.
그리고 산송장인 조경 앉혀두고 그간의 울분과 서러움을 토해내는데, 원하는 걸 얻었는데도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아요. 내가 널 사랑하고 존경하니깐 내가 만만했니? 그래서 네 생사여탈권은 나한테 있다는 걸 보여준거야, 라고 하죠. 그리고 세상 애잔하게 네가 나를 믿어주기만 했으면, 천하든 뭐든 다 가져다 줬을텐데, 이런 걸 원했냐며 원망하는 것 같아요. 조경이 자신을 사랑하고, 믿어주고, 바둑돌로 여기지만 않았으면, 평생이라도 착한 양자 노릇하며 이 연극을 계속 했을 것 같은 느낌이에요. 그리고 무시무시한 야심 드러냅니다. 그리고 내가 야심을 이뤘을 때도 넌 내 옆에 있을거야, 이렇게 못박아주죠.
아상 혼례날 일 치러 온 막회양을 치러 와서는 자신이 진정한 사냥꾼이라고 해요. 어딜가든 조경 데리고 다니는 것도 좀 무섭죠. 보여주려는 것 같아요. 니가 원하던 거 내가 어떻게 이뤄가는지 니 눈으로 봐라, 이런 느낌으로요. 세상 차분하게 진행상황도 알려주고, 앞으로의 계획도 알려줍니다. 그리고 아참, 넌 마음 따위 없지, 이럼서 정곡도 찌르죠. 근데 저리 말하는 눈은 또 어찌나 슬픈지.
그리고 막회양한테서 유리갑 뺏으러 와서는 다 죽어가는 객행이 봅니다. 자기 손으로 객행이 처리하려는데 그때도 자서가 나타납니다. 객행과 자신이 죽는다면 너도 죽일거라는 자서한테 그냥 너네 둘이서만 공생공사해라, 왜 나까지 끌어들이냐며, 아예 둘 사이 인정해줍니다. 어떤 미친 녀석이랑 같이 죽으러 왔다며, 유리갑은 니가 가져라, 난 저 사람만 데려가겠다는 자서를 보며, 세상 씁쓸하게 재미없다고 해요. 이쯤오니 객행과 자서 두 사람의 사랑의 증인이에요. 저 둘과 대비되는 자신의 처지도 씁쓸한데, 자신과 동일시하던 염귀가 죽었다니 동요하죠. 그리곤 힘겹게 모은 유리갑을 들여다보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고, 이 세상 사람 눈빛도 아닌 것 같아요.
여튼 유리갑 다 모아서, 가짜 열쇠 들고 무고까지 오는데, 여기도 조경 데리고 오죠. 그리고 이때도 자서가 나타납니다. 나는 너네를 살려줬는데, 귀곡주는 왜 나를 속인거냐며 울분을 토하고, 눈사태에 도망칩니다. 그리고 그 눈사태 속에서도 조경 가마 붙들고 있어요. 결국 껍데기만 남은 조경이랑 매장됩니다. 어쩌면 갈왕에게도 조경에게도 이쪽이 해피엔딩인 것 같아요.
그리고 산하령 리뷰 쓰다 문득 깨달았는데, 죽는다는 표현을 제일 많이 쓰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