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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우지우 Oct 09. 2021

21년 BIFF(부산국제영화제) 일지 : 2일차

영화리뷰

9시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 : 원작을 보고 싶어날려먹은 도입부를 보고 싶어


늘 1회차 영화는 아슬아슬하게 도착하곤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8시 58분에 전당 도착. 내일 영화 예매도 해야 하는데, 덜덜. 바로 상영관으로 뛰어갔어야 하는데, 굳이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 예매 해보려다 실패.(역시나 올해 BIFF에서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가뜩이나 인기작들이 즐비한데 코로나로 객석의 50%만 오픈해서 거의 모든 영화가 매표 자체가 힘듦;;) 그래서 결국 앞의 5분을 날려먹고 들어간 상영관. 


그러나 내가 이 영화를 보며 그리 줄줄 울 줄이야. BL을 좋아하는 소녀가 게이 소년을 좋아하면서 벌어지는 소소한 이야기들인데, 겁나 가슴을 때렸다. 아마도 사에가 준에게 처음 반하는 순간부터였을 꺼다. 그래, 사랑은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지지. 수족관을 들여다보며, 마찰이 0일 순 없고 세상은 단순할 수 없다는 자신의 가치관을 얘기하는 준의 옆얼굴을 들여다보는 사에의 표정에서부터 마음이 움직였던 것 같다. 자신이 게이임을 숨기고 사는 준에게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은 곳이다. 그러나 세상은 마치 게이는 존재하지 않는 냥 단순하게 굴러간다. 그런 준의 고뇌를 단숨에 알아본 사에. 비록 준이 게이라는 사실은 몰랐지만, 그녀는 준의 그 섬세한 세계관을 사랑했을지도. 


이후 준이 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사에. 너한테 이런 얘기를 들어도 더 이상 너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에의 고백이 가슴을 울린다. 둘을 둘러싼 학교 친구들 료헤이, 오노로 인해 준에 대한 소문이 학교에도 파다하게 퍼지고, 준은 투신한다. 병원에 입원한 준을 찾아온 사에가 자신의 과오를 사과하고 너를 이해해 보겠다 하고, 준도 사에를 이해하기 위해 BL 만화책을 빌린다. 준의 '나도 널 이해해 보려고. BL 만화책 좀 빌려줘' 이 단순한 대사가 어찌나 가슴을 때리던지. 


준의 소꿉친구 료헤이, 게이를 혐오하다 차츰차츰 바뀌어가는 오노, 준을 사랑하지만 안정적인 삶도 포기할 수 없는 마코토형, 게이인 아들에게 어떻게 첫마디를 건네야 할지 고민하는 엄마 등 주변 캐릭터들도 하나같이 매력적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 헤어질까? 장거리 연애는 힘들잖아. 내가 찬 거야' 라는 사에의 이별통보마저 가슴이 아렸던. 원작이 한국에 정발된 것 같던데 찾아서 읽어봐야 할 것 같은. 날려먹은 도입부 5분을 꼭 다시 보고 싶은 그런 영화였다. 


15시 <원 세컨드> : 필름시대에 대한 헌사   


아이콘, 동시대를 대표하는 거장들의 신작을 소개하는 섹션. 이 섹션에서 다른 작품을 다 못 봐도 꼭 보고 싶은 작품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장이모우의 신작 ‘원 세컨드’였다. 7-80년대 영화 상영은 마을을 축제와 다름없었다. 상영관 동지는 마을에서 덕망 높은 존재였고, 영화 상영을 앞두고 그의 말이 곧 법이었다. 판 기사의 말 한마디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마을 사람들. 꼬여버린 필름을 사수하기 위해 필사적인 그들. 온 지역민들이 필름이 담고 있는 영화를 기대하는 와중에 오로지 두 사람, 남주와 여주만이 영화에 관심이 없다. 남주는 딸이 나오는 중화뉴스 22호를 봐야할 뿐이고, 여주는 필름을 훔쳐 전등갓을 만들어야 할 뿐이다. 필름 사수를 위해 두 사람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지고, 두 사람의 화해는 영화 상영이 한참이 지난 후에야 이루어진다. 결국 보안과에 잡혀가는 남주와 필름 조각을 싸고 있던 종이를 주워 흔드는 여주. 필름 조각은 사막의 모래 바람에 쌓여 사라지고, 이는 필름시대의 종말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 영화를 보면서 최근 중드를 보면서 느꼈던 감정들이 떠올랐는데, 영화에 대한 영화다보니 극중 영화가 등장한다. 극중 영화는 빨간맛 콩사탕맛 가득한 선전영화이다. 그 선전영화를 온 마을사람들이 동네잔치 벌이듯 빼곡히 들어차 열광하며 보는 모습은 한편으로는 섬뜩하기도 하다. 필름시대에 보내는 헌사인 영화 자체는 너무나 아름다운데, 그 안의 영화는 불편한 느낌. 액자식 구성으로 보자면 액자는 너무 미려한데, 액자 안에 꽂혀 있는 사진이 보기 싫은 느낌. 중국영화나 중국드라마를 보며 간혹 느끼는 그 감정 말이다. 


최근 중국의 제재가 강화되고 현재 중국의 매체들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대강 알고 있는 나조차도 이리 생각할 정도니, 오랜만에 중국영화를 본 사람들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다. 같이 영화를 본 지인은 ‘장이모우도 이제 늙었네’라고 간단히 평했지만, 아마도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만날 중국의 영상물들이 어떤 모습일지 심히 걱정되는 상황이 아닐는지. 


19시30분 <사랑과 복수> : 인도네시아에서 피어난 홍콩의 향수 


영화 <사랑과 복수(2021, 에드윈)>는 말 그대로 주인공들이 러닝타임 내내 사랑과 복수를 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를 담아내는 틀은 80,90년대 홍콩영화의 자장 안에 있다. 감독 에드윈이 밝혔듯이 <사랑과 복수>는 감독 자신이 자라온 8-90년대 인기 있었던 아시아 영화계에 대한 헌사이기도 하다. 


동네 깡패 아조는 발기부전을 겪고 있다. 폭력적인 방식으로 콤플렉스를 분출하던 아조는 어느 날 반대파 보디가드 이텅을 만나게 된다. 티격태격 싸우다 정드는 로맨틱 코미디 주인공들과 달리 아조와 이텅은 정말 치고 박고 싸우면서 첫눈에 반한다. 그리고 그 치고 박고가 정말 살벌하다. 날라차기, 목 휘감아 던지기, 엎어치기는 기본이며, 산에서 몇 바퀴 굴러 떨어지는 것쯤은 필수다. 풀샷으로 편집 없이 보여주는 날 것 그대로의 아조와 이텅의 첫 대결은 통쾌하기까지하다. 거기다 롱샷으로 돌산에서 굴러 떨어지는 아조를 보여주며 짜릿함을 더한다. 


이리 뜨겁게 살과 살을 부닥치며 첫눈에 반한 이들 사이에 문제가 있었으니, 발기부전 때문에 이텅을 피하는 아조다. 그러나 포기를 모르는 이텅은 라디오에 끊임없이 노래 사연을 보내고 비오는 날 밤 아조를 찾아와 결혼까지 일사천리로 진행시킨다. 이들 부부의 결혼생활이자 성생활을 보여주며 각자의 과거 트라우마도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복수를 하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일단 깡패들의 세계, 거기서 피어나는 사랑과 배신, 비애감 넘치는 주인공들의 이별과 재회, 촌스럽고 끈적한 BGM 등은 홍콩느와르를 떠올리게 한다. 거기에 무협의 향취도 더해진다. 아조-이텅-부디로 이어지는 현세대, 겜블 삼촌-이완 앙사-로나로 이어지는 윗세대, 세대를 걸친 은원과 복수. 강호를 떠돌며 만나는 적수. 타격감 느껴지는 액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맹인 고수. 강호를 떠나 둘만의 은거를 바라지만 세상이 가만히 놔두지를 않는 두 주인공. 서로 목숨 걸고 사랑하지만 함께하는 시간은 찰나와 같고 자꾸 헤어지는 주인공들. 이런 공식을 거의 다 가지고 있는 <사랑과 복수>는 인도네시아판 현대 무협물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다. 


거기다 동남아시아 영화 특유의 환상적인 해결방안도 제시한다. 아마도 로나의 유령일 것으로 짐작되는 젤리타가 홀연히 나타나 아조의 발기부전이나 이텅의 트라우마를 슬쩍 건드리고 치유 및 복수를 완성하는 느낌이다. 물론 아조의 복수를 대신하는 이텅의 실행방식은 주체적이고 실질적이다. 그래서 극 말미에 등장하는 이텅의 복수 시퀀스는 킬빌의 주인공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홍콩영화의 영향을 받은 킬빌의 영향을 받은 인도네시아 영화라니. 그리고 이텅역의 배우는 8-90년대 홍콩영화의 히로인처럼 청순하면서도 강인한 이미지다. 


이렇듯 온갖 시대, 나라, 장르가 짬뽕되어 있는 것 같은 영화는 아조를 뒤돌아보는 이텅의 눈빛으로 끝맺는다. 그러면서 <사랑과 복수>라는 타이틀이 뜨는데, 정말 사랑하고 복수했구나 이런 느낌이 든다. 영제인 <Vengeance is mine, All others pay cash>보다 더 어울리는 제목이라 생각한다. 


※ 3일차 9() 주말 매표 실패로 그냥 하루 쉬었다. 그래서 이리 리뷰를 쓰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내일 매표도 오후에 자리 있는 것만 겨우 구한 상황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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