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우지우 Oct 16. 2021

21년 BIFF(부산국제영화제) 일지 : 4일차

영화리뷰

14시30분 <잃어버린 것들을 위한 기도> : 다큐멘터리 감독의 극영화 


왠지 이 영화를 꼭 보고 싶었는데 표가 안 구해지다가 취소표를 극적으로 구해서 본 영화. 멕시코 산골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소녀의 성장담으로 카르텔의 지배 아래에서 무엇을 잃어가고 그럼에도 지켜가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이다. 우선 아슬아슬한 영화의 분위기와 소녀에서 청소년으로 성장해가는 성장담의 분위기가 어우러져 외부적인 위협과는 별개로 영화 자체는 참으로 아름답다. 멕시코 산골마을의 풍광, 소녀에서 여인으로 변해가는 주인공과 친구들의 얼굴과 몸, 멀리서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 등. 


그리고 이 영화에서 음향은 중요한 장치인데, 자연의 소리뿐만 아니라 인물들의 숨소리까지 잡아내는 사운드는 영화의 질감을 풍부하게 하고 서사에 힘을 부여한다. 음악도 필요한 순간에만 효과적으로 쓰이며, 전체적으로 다큐멘터리 같은 거칠고 건조한 순간을 담고 있으면서도 섬세한 순간들을 포착해내는 수작이다. 다큐멘터리 감독의 첫 극영화로 본인의 장기를 잘 살린 극영화 데뷔작이다. <Prayers for the Stolen>이라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안나, 파올라, 마리아 세 친구의 짧은 머리, 까르르 웃음소리, 물장구 소리, 텔레파시 게임 등의 잔상이 남는 영화이다. 


16시30분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 : ...


매년 한편 이상의 비전 작품을 봐야 해서 신중하게 비전 섹션 작품을 고르는 편이다. 그러나 올해 나의 선택은 틀렸다. 최근 몇 년간 감대로 고른 비전 작품들이 좋아서 방심했나 보다. 당신의 부탁(2017년), 나는 보리(2018년), 찬실이는 복도 많지(2019년)로 이어지는 이 흐뭇한 라인업을 보라. 그리고 소공녀(2017년), 메기, 아워바디(2018년), 남매의 여름밤(2019년) 등 수상작들도 좋아서 비전 섹션 작품을 한편 이상씩은 봐왔다. 그러나 올해는 비전에서 딱히 끌리는 작품이 없었고 그래도 신중하게 골라 선택한 작품이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였다.


가끔 그런 영화가 있지 않은가. 영화는 평이했는데 감독과의 대화인 GV가 좋아서 호감도가 상승하는 작품이 있고, 영화도 그저 그랬는데 GV를 듣고는 호감도가 사그라드는 작품도 있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는 후자였다. 영화의 만듦새를 떠나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가치관 혹은 삶의 태도, 그로 인한 캐릭터 해석으로 인해 영화에 대한 호감도가 팍 꺾이는 작품이었다. 극중 캐릭터인 영태가 자존감이 높다고? 정희가 의존적이라고?? 아까는 일시적인 가난이라매? 근데 지금은 경제적으로 계속 힘들었다는 뉘앙스 아님?? 감독 자체가 플롯이나 캐릭터를 섬세하게 구성하고 찍은 작품은 아닌 듯. 근데 그것이 의도였다고 하면 할 말은 없음. 막상 영화를 보면서는 내 맘대로 해석해서 막 쓰려고 했으나, GV를 듣고는 멘붕 온 느낌. 굳이 길게 언급하고 싶지 않아 이만 줄임.


19시30분 <여성 전용 객차에서> : 영화라는 매체


영화는 심플하다. 흑백의 화면, 반복되는 인터뷰 장면, 같은 질문들. 근데 그걸 보면서 과연 영화라는 매체는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한 영화였다. 인도의 통근열차, 감독은 그 기차의 밖을 비추던 카메라를 들고 여성 전용 칸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숨 쉬는 인도 여성들의 모습을 무심히 비추기도 하고, 내밀한 목소리를 담기도 한다. 


인터뷰의 공통질문은 간단하다. 당신을 화나게 하는 건 무엇이냐는 물음. 그리고 인도 여성의 권리와 자유를 담은 아름다운 시를 보여주며 읽어보라 청한다. 무엇을 느꼈느냐는 물음. 이 두 질문이 인터뷰의 주요 골자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인터뷰이는 1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하다. 감독은 총 34명의 여성을 인터뷰하고 그중 12명의 인터뷰를 영화에 담았다고 한다.(3명 정도는 감독이 외부에서 섭외해 객차 안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고 한다.)


이 단순한 구성의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인터뷰이들이다. 다양한 종교, 신분, 계급, 인종으로 구성된 인도처럼 한 사람의 인터뷰이 안에도 여러 자아가 있고, 그것이 인터뷰를 하는 그 짧은 순간에 충돌하는 것을 카메라가 고스란히 잡아낸다는 것이다. 인터뷰이 내면의 자아가 충돌하는 그 순간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관객의 감정은 요동친다. 영화가 명징하게 전달하려는 메시지보다 저 순간의 균열이 더 큰 파열음으로 다가오는 느낌.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인상적인 인터뷰이들이 많다. 내면의 자아과 사회적 자아를 일치시켜 단단한 목소리를 내는 40대 여성. 내면의 자아와 사회적 자아를 아직은 일치시키지 못해 발화하는 내용과는 달리 순간적으로 눈빛이 흔들리는 20대 여성. 시에 대한 표면적인 감상만을 말하다가 점점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개인적 감상을 말하며, 가족과 자신에 대해 언급하며 무심코 부르카를 고쳐 쓰던 소녀. 말 그대로 물리적인 힘을 가지게 되면서 가족과 남동생에게 목소리를 내게 된 역도선수. 혼자 자식을 키운 강인한 어머니이자 여전히 가부장적 시엄마의 모습이기도 한 할머니. 


특히나 마지막 인터뷰이인 경찰이 인상적이었는데, 2달 전 결혼을 한 그녀는 첫 질문에 대해 자신은 화가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그러면 안 된다고 답한다. 시를 읽고 있는 그녀 옆에서 유사시엄마로 보이는 할머니가 고래고래 소리친다. 어떤 미친 작자가 이런 시를 썼냐, 인도 전통가족주의를 위협하는거냐, 그래, 당신 생각을 말해보슈. 경찰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시를 한번 더 읽어보겠다 말한다. 찬찬히 시를 다시 읽은 그녀는 이 시가 여성의 권리와 자유에 대해 쓴 게 맞나요? 저는 시인이 이를 반대하는 것 같은데요. 헌법에는 남성과 여성이 평등하다고 되어 있어요. 이런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횡설수설과 포괄적이고 원칙적이지만 생경한 답을 내놓는다. 그녀의 내면적 자아간, 그리고 사회적 자아간의 충돌과 혼란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관객들은 그것이 우리 중 누구의 모습도 될 수 있음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물론 이것은 인터뷰이들의 힘이다. 그리고 그것을 담아낸 감독의 힘이고, 카메라의 힘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을 기차라는 매개체를 통해 잡아내며, 인터뷰라는 찰나의 순간을 잡아내고 카메라에 담아 시간의 영속성을 만들어낸 영화의 힘이다. 영화란 무엇인가. 올해 영화제에서 이 질문의 시발점이 된 영화. 

매거진의 이전글 21년 BIFF(부산국제영화제) 일지 : 2일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