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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점 Feb 21. 2021

적당함과 욕심

나는 무슨 욕심으로 손목을 다쳤나?

일요일 새벽 1시. 왼쪽 손목에 통증이 느껴져서 어설프게 들었던 잠에서 깨어났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통증이 장난 아니다. 손목이 끊어질 듯 아프다. 조금만 움직여도 아~야~ 신음소리가 나올 정도로 아프다.  


어떻게 된 거지? 왜 갑자기 아프지? 며칠 전부터 팔굽혀펴기를 하고 나면 가끔 손목이 시큰거리기는 했다. 어제 아침에는 누워서 스마트폰을 하는데 손목이 영 불편했다. 오후에는 도서관에서 한참 글을 쓰는데 왼쪽 손목이 아파서 글쓰기를 그만두었다. 집에 와서는 삼겹살에 술을 마시고 잠이 들었다. 그랬는데 갑자기 손목이 떨어져 나가는 듯이 아픈 것이다. 전조는 있었지만 갑자기 이렇게 아프게 될 수가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아파서 구르는 와중에 두 개의 가설을 세웠다.


(1) 골절 - 작년 건강검진 결과에 골다공증이 우려된다고 했다. 자다가 눌려서, 또는 과도한 팔굽혀펴기로 조금씩 뼈에 무리가 갔고 그것이 누적되어 피로골절이 발생한 것이다. 뼈가 부러진 적은 없지만, 골절이 되면 엄청 아플 테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2) 통풍 - 그동안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주로 맥주와 막걸리를 마셨는데, 둘 다 통풍에 좋지 않다고 알려진 술이다. 통풍은 주로 발가락이나 손가락에 온다던데, 손목에 오지 말란 법 있나. 이것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나는 (1) 번이 맞다고 생각했다. 와이프는 (2) 번이 맞다고 의심했는데, 그것은 ‘그러게 술 좀 작작 먹었어야지’란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었다.


뭐가 맞는지 간에 아파 죽을 것 같았다. 밤 새 잠이 들었다가 통증에 다시 깼다가를 반복했다. 너무 아파 응급실이라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가 비쌀 것 같아서 좀 더 참아 보기로 했다. 아침이 되니 통증이 더 심해졌다. 와이프가 인터넷을 찾아보더니 일요일에도 문을 여는 병원이 있단다. 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타이레놀 한 알을 입속에 털어 넣고 병원으로 갔다. 망포역에 있는 그 병원은 큰 건물의 서너층을 쓰고 있었다. 평소에 버스를 기다리면서 많이 봤지만, 이 정도로 큰 줄은 몰랐다. 일요일 아침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손님은 나 혼자 뿐이었다. 큰 병원을 전세 낸 듯 독차지하고 왕처럼 진료를 받았다.


빨간 부분을 누르면 아팠다


의사가 엑스레이를 보더니 뼈에는 이상이 없단다. 내 가설은 틀렸다. '그럼 통풍인가요?' '아니요.' 와이프의 가설도 틀렸다. 의사는 손목 여기저기를 눌러보며 아픈지 여부를 물었다. 여기를 누르면 아파요? 아니요. 여기는요? 안 아파요. 여기는요? 아~야~ 아파 죽겠어요. 의사는 손목터널 증후군인 것 같단다. 손목을 움직이지 않으면 점점 나을 것이란다. 일주일이 지나도 안 나으면 MRI를 찍어 보자고 했다.


병원에서는 손목을 고정시킬 수 있도록 부목을 대 주었다. 옛날처럼 석고로 둘러싸는 깁스가 아니고 플라스틱으로 된 틀에 찍찍이로 손목을 고정시키는 반깁스 방식이다. 부목 때문인지 주사를 맞아서인지 병원 문을 나서자마자 거짓말처럼 통증이 사라졌다. 조금 아까만 해도 아파서 죽을 것 같았는데 말이다. 물론 손가락이나 손목을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이내 고통이 다시 찾아왔지만 부목 덕에 안 움직일 수 있었고 그래서 아플 일이 없어진 것이다.


손목터널 증후군이 왜 생긴 것일까? 왜 마우스도 안 쓰는 왼손인가? 팔굽혀펴기를 너무 심하게 했나? 키보드를 너무 많이 두드렸나? 스마트폰을 너무 많이 했나?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그러게 무리하지 말았어야지. 적당히 했어야지. 적당히. 적당히.


적당히 운동해라. 적당히 일해라. 적당히 마셔라. 모두 무리하지 말고 지나치게 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적게 하면 모자라고 지나치게 하면 넘친다. 적당함은 모자람과 넘침의 사이의 어딘가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어디가 적당한 선일까? 어디까지 하면 적당한 것인지 알 수는 있을까?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눈을 감고 컵에 물을 따라 보자. 물 따르는 소리를 듣고 얼마나 찼을까를 가늠해 보자. 물이 차 오름에 따라 소리가 높아진다. 언제 넘칠까 조마조마하다가 결국에는 넘친다. 물이 넘친 다음에야 알게 된다. 아까 멈췄어야 했다는 것을.


적당함이란 넘침을 겪어봐야 알 수 있다. 넘치기 전이 적당함이다. 적당함의 전은 모자람이다. 넘침에는 대가가 따른다. 그것은 물에 젖는 것일 수도 있고, 몸이 상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상할 수도 있고, 남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 시간을 잃을 수도 있고, 돈을 잃을 수도 있다. 하지만 넘치기 전까지는 어디까지가 적당한 지 알 수 없으니, 그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경험이라고 부른다. 적당함은 경험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한 번의 경험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현대 사회는 바쁘다. 경쟁이 심하고 효율이 중요하다. 그래서 효율을 높인다는 이유로 넘치기 직전까지 내달리도록 밀어붙여진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최대한의 성과를 내기 위해, 지금보다 더 적당하기를 강요받는다. 모자람과 적당함의 경계는 점점 넘침 쪽으로 밀린다. 넉넉하게 자리 잡고 있던 적당함은 그 너비가 좁아져 여유로움을 잃어간다. 그러다가 삐끗하면 넘침의 영역까지 침범하고 결국엔 대가를 치른다. 때로는 그 대가가 혼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클 때도 있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모자람을 채우려는 욕심과 적당함에 안주하려는 마음은 항상 서로 싸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노력은 선이요 안주함은 악이라 배웠으니, 안주함이 아무리 지지 않으려고 버텨봐야, 질책하며 몰아붙이는 욕심에 자리를 내어 주기 십상이다. 나 자신을 이기기 위해서 또는 남에게 지기 싫어서 부리는 욕심에 타협하고 굴복하는 것이다. 넘칠 때까지 적당함을 밀어붙이는 것은 결국 내 욕심이다.


적당히란 말은 다분히 결과론적이다. 넘쳐 봐야 적당함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경험과 시행착오를 반복해야 언제 그만두어야 하는지 감이 생긴다. 그래서 ‘이 정도면 적당하다’는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욕심 또한 결과론적인 말이다. 넘치기 전까지는 욕망이고, 의지고, 투지이다. 넘치고 나면 그게 욕심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제 다시 질문을 던진다. 나는 무슨 욕심으로 손목을 다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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