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표현의 중요성
얼마 전 인천 을왕동 도로에서 치킨 배달 중인 오토바이가 음주 차량에 치여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50대 가장이었던 피해자의 사연이 보도되고 피해자의 딸이 청와대 국민청원에 글을 올리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에 분노했고 피해자의 죽음을 모두 애도했다. 나도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그 가족이 느낄 억울함과 상처에 정말 슬펐다. 힘든 가장의 무게가 얼마나 컸을지... 남겨진 가족은 앞으로 어떻게 이를 극복하며 살아야 할지... 이렇게 한 가정의 파탄을 가져온 음주 운전자는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함이 마땅하다. 면허 취소에 해당할 만큼 음주를 한 상태에서 운전을 했다는 사실은 정말 경악하게 만든다. 심지어 운전자 옆에서 이를 방조한 동승자 역시 그 책임을 따져봐야 할 부분이다.
그런데 나는 이 사건을 보도하는 일부 언론을 바라보며 보도 시각에 대해 우리가 한 번쯤은 생각해 봐야 할 문제에 대해 얘기해 보려고 한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음주 벤츠', '만취 벤츠'라는 타이틀로 기사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기사를 접하면서 '음주 차량'도 아니고 왜 꼭 '음주 벤츠'라고 제목에 표현해야 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우선 이런 제목 자체가 상당히 자극적이란 느낌이 든다. '음주 차량'은 많은 기사에서 흔히 보는 키워드에 반해 '음주 벤츠'는 관심도를 끌 수 있는 키워드이긴 하다. 보도 입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서 클릭수를 높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굳이 이런 키워드를 제목으로 달지 않아도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안타까운 사건이다. 더욱이 코로나 19로 너도 나도 힘든 시기에 치킨 배달을 위해 밤늦은 시간 오토바이 배달을 하던 가장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 슬프고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의 현실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런데 '벤츠'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이런 기사에 의해 조정되는 느낌이다. 기사 본문에 차량에 대한 정보를 입력해 주는 것은 정보를 습득하는 대중에게 필요하다. 하지만 제목에서 쓰인 '벤츠'가 눈살을 찌푸려지게 만드는 이유는 대중이 사건에 대해 객관적인 정보를 습득하기 전에 이미 가해자와 피해자에 대한 사고와 관련 없는 이미지를 씌우고 있다. 외제 차량 벤츠를 타는 돈 많은 사람이 가해자라는 인식을 주면서 우리 사회에서 느끼는 '가진 자'에 대한 열등감과 분노를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벤츠의 차량 문제가 이 사고를 유발한 것도 아니고 벤츠가 음주를 한 것도 아니다. 만약 가해자가 현대나 기아 차량의 국산차량을 타고 있었다고 한다면 기자는 '음주 현대', '음주 기아'라는 타이틀을 붙였을까? 괜히 궁금한 마음에 포털에 이런 키워드로 검색해 보아도 이런 타이틀의 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문법적으로도 '음주 벤츠'라는 표현은 맞지 않다. '음주 차량' 혹은 '음주 운전자'라는 수식어와 중심어의 결합이 적절하다. 기자는 '벤츠'를 가해자로 대체하고 이런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런 단어 하나가 우리 사회에 보이지 않는 갈등과 절망을 유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가해자의 행동은 굳이 이런 프레임을 씌우지 않아도 용서되기 힘들 만큼 큰 죄를 저질렀다. 이런 타이틀을 붙이려고 노력하는 시간에 피해자의 피해 사실을 어떻게 객관적으로 전달하여 피해자에게 억울한 일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사회 전체의 관심을 이끌어 감시 기능을 강화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시간을 좀 더 가졌으면 좋겠다.
이렇듯 우리는 무심코 지나가게 되지만 우리 일상에서는 이렇게 많은 것들이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지배하려고 하는 거 같다. 우리 일상에서도 이런 일들은 다반사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남의 얘기를 자기 멋대로 썰을 풀기도 한다. '무심코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는 말이 있듯이 남에 대해 얘기할 때는 제발 좀 '조심스럽게' 다뤄주면 안 될까? 내가 이혼을 하면서 주변에서는 별의별 험담들을 사람들이 하는 것을 알았다. 나에 대해 악질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아주 쉬웠다. 그냥 단어 하나만 추가하거나 교체해도 그런 프레임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얼마 전 티브이에서 큰 아이를 하늘나라로 보내고 둘째 딸아이와 힘들게 살아가는 엄마의 사연이 나왔다. 그 엄마에게 큰 상처는 자신이 둘째 아이와 웃으며 얘기를 하고 걸어가니까 동네 엄마들이 '자식 보내고 웃음이 나와?'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그 엄마가 느끼는 고통의 시간들이 그렇게 우습게 보이는 걸까? 처절하게 버티며 살아가는 엄마의 모습은 정작 안 보이는 걸까?
'자식 먼저 보내고도 미소 짓는 엄마', 이런 프레임이 이 엄마를 힘들게 하는 것이다. 공인도 아니고 유명인도 아닌 보통 시민인 우리에게 명예훼손은 사법기관의 관심사가 아니다. 허위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이어도 평범한 시민에게 허위 사실은 남들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냥 무심코 던진 돌멩이에 왜 네가 맞니? 이런 격이다. 어쩌면 '음주 벤츠'는 사실이니까 억울할 것은 없지만 '미소 짓는 엄마'는 억울할 일이다. 난 인생은 부메랑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뱉은 말은 메아리치며 다시 내게로 돌아오듯 남에게 상처 주면 그 상처는 고스란히 자신이 언젠가 떠 앉을 거라 믿는다. 남의 불행이 뭐 그리 좋다고 가십거리처럼 떠들어대는지... 혹은 남을 그렇게 불행하게 만들면 뭐 그리 좋다고 희희낙락 거리는 지...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좋지 않은 기운을 주는 사람들이 꼭 있다. 그런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프레임에 우리가 걸려들지 않는 총명함과 현명함이 지금 우리는 필요한 시기이다.
(photo by 신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