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처음 이 그림을 봤을 때, 마주 보는 두 사람이 보였고 다시 보았을 때는 꽃병이 보였다. 이 그림은 덴마크 심리학자 에드가 루빈이 고안한 그림인데 우리가 동시에 두 그림을 볼 수 없는 인지적 사고를 설명한다. '루빈의 잔'이라고 부르는 이 그림은 내가 '언어학'이론을 공부할 때 인지언어학에서 처음 접하였는데 같은 도형이라도 사람마다 다르게 인지되어 다른 의미를 도출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그때 난 이 그림을 보고 인간의 한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이 그림에서 정답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어떤 문제에 부딪치면 '정답'을 찾으려고 애쓴다. 그리고 나머지는 '오답'으로 처리해 버린다. 우리가 찾은 정답이 정말 정답인 걸까?
예를 들어 마주 보는 두 사람을 본 사람 입장에서는 꽃병을 본 사람이 오답으로 생각할 수 있다. 혹은 마주 보는 두 사람을 본 사람 입장에서 꽃병을 본 사람이 오답은 아니지만 본인이 더 정답에 가깝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일부 마주 보는 두 사람을 본 사람 가운데 꽃병을 본 사람도 정답이라고 함께 인정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이 그림에서 이 두 가지 모양 외에도 다른 모양을 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즉 다양한 경우의 수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그림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우리가 인지하는 세상에는 한계가 있으며 그 한계를 인정하고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는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내가 다 아는데...'
'내 말이 맞는데...'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 가족들도 자주 사용하는 문장 어두 표현이다. 왠지 이 말로 시작하면 상대를 제압해서 상대의 생각과 의견까지 공감하게 만들 수 있다는 심리적 기대감에 사용하는 거 같다.
이런 표현에 '네가 뭘 안다고'까지 들어가면 상당히 격한 압박감을 상대에게 주게 된다. 과연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대단한 우월감으로 이렇게 자신 있게 남에게 말하게 만드는 걸까? 가끔 이런 대담함이 나의 말문을 막히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들 '인생에 정답은 없다', '교육에 정답은 없다' 등의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정답이라는 규격화된 틀 안에 우리의 삶을 정형화해서는 안 된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그냥 정답은 아닐까?
우리는 살면서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만 같다. 부모는 자식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고, 선생님은 학생에게 정답을 강요하고, 남편과 아내는 자신의 감정만을 상대에게 강요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난 요즘 '조언'이라는 단어가 좀 무겁게 느껴진다. 인간은 사물과 사건을 인지하는 것에 분명한 한계가 있는데 어찌 다른 사람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을까? 그건 오만이고 교만이다.
예전에 시어머니가 나에게 부하에게 지시하듯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강요하길래 내가 불쾌한 티를 낸 적이 있다.
평소 영어를 섞어 쓰기를 좋아하는 시어머니는
" 왜? 난 그냥 너에게 advise 한 것뿐이야"라며 자신의 행동을 '조언/충고'라는 말로 정치 9단같이 말 바꾸기를 하며 불쾌한 티를 낸 며느리를 비꼰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어머니, advise는 advise일 뿐이니까요, 참고하는 거지 제가 꼭 그렇게 해야 하는 건 아니네요. 어머니의 advise는 잘 이해했으니 걱정 마세요"라며 받아친 적이 있다. 조언은 조언일 뿐이다. 며느리는 며느리의 관점과 시각이 있기 때문에 시어머니라도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나를 시어머니는 어른에게 말대꾸했다면 '교만'하다고 표현했다. 그런데 진정으로 교만한 것은 자신의 인지적 한계를 알지 못하면서 남에게 강요하고 있는 본인이라는 것을 진정 모르는 것 같다.
'맞고 틀리고'가 아니라 '같고 다르고'일뿐이며, 심지어 '같거나 다르거나' 도 다 괜찮은 세상인데 우리는 뭘 그렇게 따지며 사는 걸까?
우리는 각자 인지하는 것에 따라 다른 언어적 표현을 쓴다.
컵에 물이 반이 있는 상황에서
한 사람은 "물이 반이나 있네"
또 다른 사람은 "물이 반밖에 없네'라고 말한다.
두 사람의 언어 표현에서 이 사람들이 물 잔에 어떤 기대를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반이나'라고 표현한 사람은 자신이 생각한 물보다 많은 경우일 것이고, '반밖에'라고 표현한 사람은 그 이상의 물을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는 같은 상황의 장면을 보고도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그 생각에 따라 다른 언어적 표현이 나온다. 이것 역시 정답은 없는 것이다. 정답도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남에게 함부로 자신의 잣대로 손가락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남을 손가락질하면서 상대를 가리키는 손가락보다 나를 향하는 손가락의 개수가 더 많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그게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지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더 큰 영역이 있음을 인정할 때 난 비로소 겸손을 알게 되는 거 같다. 교만과 겸손 사이에서 우리는 항상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난 이렇게 하나씩 세상을 알아가고 있고 내가 죽을 때까지 다 알지 못하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한계를 알고 있기에 조급하지 않고 지금처럼 하나씩 깨우치면서 살아가고 싶다.